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박문수의 위민사상은 사재를 털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사회모순에서 원한과 괴로움이 있는 민중들을 위한 사회정의를 우선으로 생각한 책임감 있는 관료상을 보여주었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정치가(政治家)이나, 부패한 관리를 적발한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다.

영조가 박문수의 죽음에 대한 논평에 잘 나타난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 (박문수)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잠잘 때 외에는 경영성군 박문수를 생각한다.” 박문수(1691~1756)와 영조(1694-1776)는 군신 관계를 벗어나 평생동지이며 인생의 동반자였다.

그는 경상도 관찰사 (경찰권과 사법권과 징세권을 가진 경상도지사),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 황해도 수군절도사(황해도 해군을 통솔하는 사령관) 등 다양한 고위직에 있다가 1751년(영조 27년) 61세 때 한성판윤(오늘날의 서울시장과 서울고등법원장과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겸직)에 임명된 인물이다.

조선 시대 암행어사는 600여 명이었다고 하는데 조광조, 이황, 채제공, 김정희, 정약용 등 쟁쟁한 암  행어사 출신들이 있지만,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가 먼저 떠오른다. 그 인물이 1691년 10월 13일(음력 9월 8일 숙종17) 외가인 평택시 진위면 봉남3길 아곡마을(당시 진위현 향교동)에서 태어나 다섯 살까지 자랐다. 2021년 올해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태어난 지 330주년이라고 한다. 이곳 평택에 암행어사 박문수 문화관이 있다.


박문수 문화관

박문수의 가계도를 보면 증조부 박장원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부 박선은 김제 군수, 부친은 학자셨고 어머니는 공조판서 이세필의 딸이다. 박문수의 부인은 대동법 시행의 주역인 김육 가문의 후손이다. 박문수는 33세에 시조 '낙조(落照)'로 증광감시에 급제한다.

落照(낙조)
落照吐紅掛碧山(락조토홍괘벽산)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尋寺歸僧杖不閒(심사귀승장불한)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望夫臺上妾低鬟(망부대상첩저환)
蒼煙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로)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롱적환)

지는 해 붉게 물들어 푸른 산에 걸려있고 갈가마귀 싸늘히 울며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지네
나루터를 묻던 길손은 말을 급히 몰아가고 절을 찾아가는 중은 지팡이 옮기기 바쁘구나
풀밭에 놓아먹이는 소의 그림자 길게 드리웠고 누대 위에서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은 수심에        잠기네
개울 아랫길 고목 사이로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더벅머리 초동은 피리를 불며 돌아오누나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높은 벼슬자리나 임금의 총애도 아니요, 학문이나 문장도 아니었다. 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그 고마움의 표현으로 그에게 얽힌 일화를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이러한 풍모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임금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허리만 약간 굽혔을 뿐, 절을 하지 않았고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고 한다. 다른 벼슬아치들이 이를 나무라면 영조는 임금과 신하가 너무 딱딱하게 지내면 서로 흉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이르고 “부복(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지 말고 얼굴을 들어 보라”고 했다.

그는 1727년(영조3) 37세 때 영남 만집어사, 1731년(영조 7) 41세 때 영남 감진어사, 1741년(영조 17) 51세 때 북도 진휼사, 1750년(영조 2G) 60세 관동영남균세사를 지냈다. 박문수는 네 차례 어사로 파견되었는데 세 번 (1727, 1731, 1741)은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제(진출)하기 위한 파견이고 1750년 파견은 세금을 바로잡는 법을 정하기 위한 목적(균세)이었다.

비밀리에 지방에 잠입하여 관리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정조대에 암행어사와는 다른 별건 어사로 박문수가 파견되었지만, 암행권이 주어졌다. 1727년 영남 별건 어사로 경상도 내 수령을 비롯한 네 명의 관리에 대해 파직을 요청하는 영조실록」(제16권, 영조 4년 3월 11일)이 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영조를 알현하여 그동안 해결한 안건 들을 보고하였고, 남대문 출두를 하여 호조판서를 비롯한 관리들의 죄상을 낱낱이 아뢰고 조정대신 20여명을 붙잡아 처분했다.
결국 백성들을 위한 박문수의 위민사상은 사재를 털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사회모순에서 원한과 괴로움이 있는 민중들을 위한 사회정의를 우선으로 생각한 책임감 있는 관료상을 보여주었다.


박문수에 대한 설화만 해도 210여편, 단행본 122권. 논문 76편, 대중가요 25곡, TV드라마 10편, 영화4편, TV사극 16편 등이 있다.   사진 네이버


박문수 묘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충남 문화재자료 제261호로 지정
묘의 앞에는 상석·묘비·망주석·무인석 등이 있다. 묘소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이 있으며, 재실 내에는 영정 2폭이 보관되어 있다.

천안 북면 재실에 세워진 박문수 신도비이다.
오석 재질로 거북모형의 좌대에 높이 2.4m, 넓이 0.9m 크기로 만들어져 어사의 정의롭고 깨끗했던 생애와 업적 등을 소개하고 있다.


박문수 영정 보물 제1189호

마패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