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시에도 뛰어나,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제
불수호란행 (不須胡亂行)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수작후인정 (遂作後人程)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 작품은 김구(金九) 선생의 애송시로 많은 애독자를 갖고 있다. 서산대사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작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집(淸虛集)'에는 실려 있지도 않다. 이양연의 시집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려 있고,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이양연의 작품으로 올라 있어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짧은 시에 촌철살인의 시상(詩想)을 멋지게 펼쳐내고, 따뜻한 인간미와 깊은 사유를 잘 담아내는 이양연의 전형적인 시풍(詩風)을 보여준다.

어느 날 눈길을 헤치고 들판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행로가 지니는 의미를 반추해본다. 누가 보지 않아도 똑바로 걷자. 혹시라도 내 행로가 뒤에 올 누군가의 행로를 비틀거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똑바로 살자. 내 인생이 다른 인생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 아마 이런 뜻의 잠언(箴言)이리라.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던 세도정치기에도 순백(純白)의 설원(雪原)에 서면 누구나 맑은 영혼으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나 보다.
1985년에 북한 문예출판사에서 발간한 <한시집> 안에도 이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책에는 제목은 야설(野雪), 지은이는 임연 이양연(李亮淵 - 이량연이라고 읽기도 합니다)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한문학자 안대회 교수는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과 1917년에 장지연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이 시가 순조 때 활동한 시인 이양연(1771 영조 47~1853 철종 4)의 작품으로 나와 있다고 했다.

대동시선(大東詩選) 8권(卷之八) 30장(張三十)에 나와 있는 이 시는 제목이 '穿雪(천설)'로 되어 있고 내용 중 '답(踏)'자가 '천(穿)'자로, '일(日)자가 '조(朝)'자로 되어 있는 것 두 글자가 다를 뿐 의미는 똑같다.
북한에서 발간한 한시집에도 이 두 글자는 대동시집과 같은 글자를 쓰고 있다고 한다.


야설野雪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천설야중거 불수호란행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  금조아행적 수위후인정
눈을 덮어쓴 들판속으로 가니, 어지럽게 가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아침 나의 행적은 좇아오는 뒷 사람을 위한 행로가 될 것이다.

雪朝野中行  눈온 아침에 들길을 갈니
開路自我始  길을 여는 것은 나 부터라
不敢少逶迤  감히 삐둘거리며 걷지 못함은
恐誤後來子  뒤에 올 사람을 무서워이다.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시에도 뛰어나,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진숙(晋叔)이며, 호는 임연(臨淵)이다. 1830년(순조 30) 음보(蔭補)로 선공감(繕工監)에 제수되고, 1834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38년(헌종 4)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거쳐, 1842년 공조참의가 되었고, 1850년(철종 1) 동지중추부사, 이듬해 호조참판·동지돈녕부사 겸부총관에 제수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역대의 전장(典章)·문물(文物)·성력(星曆)·술수(術數)·전제(田制)·군정(軍政) 등에 널리 통하였다. 늙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문장이 전아간고(典雅簡古)하여 후학들이 다투어 암송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사대부로서 농민들의 참상을 아파하는 민요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 중《야설(野雪)》이란 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애송(愛誦)하였다고 한다.

저서에《침두서(枕頭書)》 《석담작해(石潭酌海)》 《가례비요(嘉禮備要)》 《상제집홀(喪祭輯笏)》등이
있고, 민요시《촌부(村婦)》 《전가(田歌)》 《해계고(蟹鷄苦)》등을 남겼다. 묘는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麻長面)에 있으며, 묘갈명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묘지명은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이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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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