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릉도로 살펴보는 왕릉의 풍수적 입지

산릉도는 능을 중심으로 한 주위 산수의 지형지세와 경관 요소를 풍수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다른 이름으로 왕릉산도(王陵山圖), 산형도(山形圖)라고도 했다.

산릉도로 살펴보는 왕릉의 풍수적 입지

산릉도는 능을 중심으로 한 주위 산수의 지형지세와 경관 요소를 풍수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다른 이름으로 왕릉산도(王陵山圖), 산형도(山形圖)라고도 했다. 조선왕실은 왕릉의 조성, 입지, 배치, 형태, 구성 등에 관련된 주요 사실을 산릉도에 상세하게 재현하였다. 산릉도에는 능침을 중심으로 능역을 이루고 있는 자연적 지형경관과 인문적 지리정보, 그리고 왕릉을 구성하는 석물과 건물 등이 회화식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입지 조건에 관한 풍수적인 산수 인식 및 묘사 방식과 관련된 풍수 정보가 표기됐다. 산릉도는 풍수적 명당 입지라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왕권의 정통성과 권위를 강화하는 정치·사회적인 수단으로도 적극 활용되었다.


          숙종(왼쪽)과 인현왕후(오른쪽)의 봉분과 상설. 동쪽을 등지고 서향(서서남)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왕조에서 제작한 산릉도의 몇 가지 전형적인 사례를 통해 풍수적 경관 묘사 방식과 재현 의도를 살펴보자. 지릉 산릉도(규장각 소장 『왕릉산도』 「지릉」, 『지릉전도』)는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능을 그린 것이다. 『왕릉산도』 「지릉」을 보면, 능의 입지를 주위 산세가 겹겹이 에워싸인 풍수 산도 형식으로 묘사하였다. 주위 둘레로는 24방위를 기재하였다. 능침 위로는 임좌(壬坐)라고 적었고, 마주하는 방위 표기에는 병향(丙向)이라고 좌향을 적었다. 능침이 남향으로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능침 앞으로는 장명등, 석마, 석양, 정자각, 수라간, 홍살문, 비석, 재실이 글자 표기와 함께 그려졌다.

태조는 조선을 개국하고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고,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4대 조부모부터 부모까지의 능을 조성하고 전각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이러한 태조가 조성한 선대의 왕실 경관은 후대에 와서 산릉도에 상세히 재현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뒷받침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명릉 산릉도(장서각 소장 「명릉 산형도(明陵山形圖)」)를 살펴보자. 이 산릉도는 제19대 왕 숙종과 둘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 셋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을 그린 산릉도이다. 명릉 산형도에는 능역을 구성하고 있는 경관 요소들이 회화식으로 표현됐다. 산은 점묘법(點描法)으로 표현하고 녹색으로 채색했으며, 길은 붉은색 실선으로 나타냈다. 능역은 둥글게 표시하고 명릉이라 기입하였고, 아래로 비각을 비롯하여 정자각 및 부속 건물을 입체적으로 채색하여 그렸으며 홍살문도 보인다. 왼쪽으로는 재실도 표현했다. 산줄기 바깥 둘레로는 지리정보로서 효경현(孝敬峴), 내봉현(內蜂峴), 봉현로(蜂峴路) 등 고개와 길의 명칭도 기입했다.

그리고 입지 조건에 관한 풍수적 산수 묘사 방식과 함께 자세한 풍수 정보를 표기했다. 먼저 이 산릉도는 명릉 주위의 방위와 산줄기 및 물줄기를 풍수적인 시선으로 재현했다. 우선 산릉 둘레로 24방위를 표시했다. 그리고 산줄기와 맥은 풍수적인 형세를 띠고 주산(主山)에 해당하는 앵봉(鸎峯)에서 명당인 명릉에 이르고 있다. 주위의 산들은 명릉과 조응하고 에워싸고 있다. 주산에 상대하는 조산(朝山)으로서 망월산(望月山)도 유의하여 표기했다. 물줄기는 양측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내려오다가 명릉의 명당 국면을 이루고 재실(齋室) 앞쪽에서 합수해 빠져나간다.

          02.『왕릉산도』「지릉」 03.『지릉전도』: 다른 종류의 지릉도이다.


풍수 산도의 이미지로 능을 에워싸는 겹겹의 산세와 구불거리고 수구로 빠져나가는 물길을 그렸다. 『왕릉산도』에 비해서 특히 능 내부의 건조물들이 사실적으로 상세히 묘사되었다. 능침 앞으로 각종 석물의 모습과 정자각, 재실, 비석 등의 위치를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조선은 풍수문화를 꽃피운 왕조였다. 동아시아의 어느 시대 어느 왕실보다 풍수를 폭넓게 활용했고 철저히 실천했다.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간생활사 전반에 풍수는 큰 영향을 주었다. 길지를 찾아 태실을 조성했고, 풍수를 따져 궁궐에 살았으며, 생명이 다한 몸을 산릉의 명당에 묻었다. 이러한 장소미학은 각각 태실풍수, 궁성풍수, 산릉풍수로 구현되었다.

산릉풍수는 조선왕조에 와서야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다. 왕조에서 제도적으로 풍수를 운용하면서 참고했던 책은 모두 뫼터풍수서였다. 조선왕실에서 능자리를 골라 모신 것은 인륜의 도리를 다할 뿐만 아니라, 풍수에 기대어 왕조의 번영을 희구했기 때문이었다. 산릉은 단순한 왕실의 무덤을 넘어서 조선의 왕, 왕실, 외척, 신하 간에 얽힌 정치권력의 역학관계가 고스란히 투영된 경관 단면이었다. 거기엔 산릉의 조성과 이장을 둘러싼 정치적인 배경이 도사리고 있다. 정치세력을 주체로 공간과 권력을 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조선왕릉을 둘러싼 사회문화사의 이해에 중요한 시선이 된다.

04.「명릉 산형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8일이 지난 후 총호사 이세백이 산릉을 둘러보고 와서 산도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산형도는 둘레에 24방위를 표기하였고, 능역에 이르는 주위 산세와 내맥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주요 봉우리에는 이름도 기록했고, 능역의 물줄기도 잘 표현되고 있다. 명릉의 능침과 정자각, 홍살문 등도 소상하게 그렸다.

05.인원왕후의 능침 뒤에서 바라본 입지경관


조선왕실에서 풍수를 실천한 것은 그 결과로서 기대하는 풍수적 소응과 효과만으로 한정되지 않았고, 왕권을 강화하고 드러내는 정치·사회적인 수단으로도 적극 활용됐다. 그것은 정치적 동기를 지니고 이루어졌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공간적 통치전략이기도 했다. 국왕은 궁성과 태실, 산릉의 풍수 입지와 경관 조성을 통치자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조선왕실에서 실행된 산릉의 입지 선정과 이장 과정을 둘러싼 치열한 쟁론은 국가적 대사를 둘러싸고 각 정치세력 간에 벌이는 주도권 다툼이자 경합이기도 했다. 풍수가 매개된 산릉의 이장은 권력집단 간에 상대를 정치적으로 숙청하는 데도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렇듯 능의 풍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세력 간의 다툼은 조선왕실 산릉풍수의 독특한 한 현상을 이룬다.  글, 사진. 최원석(경상국립대학교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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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