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成佛)의 마음으로 그린 세상 국보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장곡사(長谷寺)에는 특별히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불이 그려진 괘불이 모셔져 있다.

성불(成佛)의 마음으로 그린 세상 국보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불교 용어 중 야단법석(野檀法席)이란 말이 있다. 야외에 단을 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고즈넉한 사찰 마당에 예불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울려 퍼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면 특별히 걸어 놓는 의식용 불화가 있다. 바로 괘불(掛佛)이다. 괘불은 수 미터에서 십여 미터 대형 화폭에 부처님의 설법 모습을 그린 걸개그림으로 그 규모와 작품성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01.국보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長谷寺 彌勒佛 掛佛幀)〉 1673년, 삼베에 채색,

충남 청양 장곡사 ©성보문화재연구원

괘불에 담긴 부처님의 모습

괘불의 제작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1592)부터 병자호란(1636)까지 연이은 외적의 침입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는 대규모 천도의식을 치르면서 괘불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찰의 대규모 야외 행사나 법회가 열릴 때면 밖으로 괘불을 이운(移運)하여 전각 앞에 있는 괘불대에 걸어 놓고 법회 의식을 행하였다. 불교를 믿는 대중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사찰에 모여든다. 그래서 불교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의 모습도 한 분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괘불의 제작 기록을 적은 화기(畵記)를 살펴보면 대부분 영산회괘불(靈山會掛佛), 대영산괘불(大靈山掛佛) 등으로 괘불을 지칭하고 있다. 영산회(靈山會)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했던 때의 모임으로, 괘불의 도상 중에는 영축산의 석가모니불을 그린 영산회상도의 비중이 가장 크다. 충청남도 청양군 칠갑산에 위치한 장곡사(長谷寺)에는 특별히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불이 그려진 괘불이 모셔져 있다.

불교 경전인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에 따르면, 미륵불은 석가모니 입멸(入滅)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후 이 세상에 내려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로, 성불(成佛)하기 이전에는 미륵보살로 성불한 이후에는 미륵불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현재까지 문화재로 지정된 괘불 120여 점 중 미륵불로 불리는 예는 부여 〈무량사 미륵불 괘불탱(無量寺 彌勒佛 掛佛幀)〉(1627)과 청양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長谷寺 彌勒佛 掛佛幀)>(1673) 단 2점으로 미륵신앙은 조선시대 충청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민간에 깊이 신앙되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불교회화와 조각에서도 미륵불의 모습이 확인된다.


천년고찰 장곡사 마당에 간절한 마음이 모여들다

장곡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보조 선사(804~880)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이것은 『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七甲山長谷寺金堂重修記)』(1777)의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며, 장곡사의 역사를 직접 입증하는 문헌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1407)의 기록에서 장곡사가 조선 왕실의 자복사(資福寺, 국가와 왕실을 위해 복을 기원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곡사는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에 유서 깊은 사연을 다 흘려보내고 1,000여 년 동안 사찰 곳곳에 크고 작은 문화유산들을 남겨 놓았다.

국보로 지정된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은 현종 14년(1673)에 조성되었다. 삼베 바탕에 전체 높이 898cm, 너비 586cm(화면 806×556cm)인 대형 불화이다. 특히 괘불은 도상을 그린 뒤 각 존상의 명호(名號)를 방제(旁題)에 적어놓아 그동안 도상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었던 제작 시기와 도상의 의미를 명확히 알려준다. 양손으로 연꽃 가지를 든 미륵불은 화면 중심에 서 있으며 그 주위에 좌우대칭으로 불보살과 권속, 청중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기나긴 수행으로 무수한 공덕을 쌓은 미륵불은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어 근엄하기보다는 친근한 모습이다. 대형 화폭에는 모두 39분이 그려져 있고 미륵불에 비해 권속들은 비중과 화면 구성에 따라 작게 그려져 거대한 미륵불이 더욱 돋보인다.

어떻게 350년전, 부처님 설법을 듣기 위해 여러 불세계에서 모여든 많은 이들을 대형 화폭에 담아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화승(畵僧)으로는 철학을 수화승(首畵僧)으로 천승, 신밀, 일호, 해종 등 다섯 명이 괘불 제작에 참여하였다.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은 ‘영산대회괘불탱(靈山大會掛佛幀)’이라는 화기 내용에 따라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어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임을 입증하고 있으나, 화기 내용이나 화면 구성과 달리 방제에는 본존불을 미륵존불(彌勒尊佛)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미륵불을 영산회의 본존으로 신앙하는 것은 일반적인 불화의 형식과는 맞지 않는다. 당시의 불교 의식집인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1661)은 영산작법(靈山作法) 의례절차 중 미륵불을 거는 것을 지적하면서 석가모니불과 미륵불이 함께 수용되던 단계에서 영산회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 의식에 걸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장곡사 괘불은 조선 후기 의식집의 과도기에 존재했던 괘불의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륵불이 깊이 신앙되어 온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전란으로 어려운 현세에 희망을 기원하고 안정된 삶을 바라는 마음이 석가모니불을 대신해 현세의 고통을 구제하는 미륵불을 더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희망과 위로의 시간, 괘불을 펼치다

咸鏡道竝有風雨霜雹之災 禾稼大傷, 江原道冷雨早霜 各穀損傷, 平 安道霜雹之災最甚, 全羅道牛疫大熾, 忠淸道早霜害穀  함경도에 비·바람·서리·우박 등의 재앙이 아울러 있어서 벼농사가 크게 상하였고, 강원도에는 찬비와 조상(早霜, 서리)이 내려 모든 곡식이 손상 되었으며, 평안도에는 서리와 우박의 재앙이 가장 심하였고, 전라도에는 우역(牛疫, 소의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으며, 충청도에는 조상으로 곡식을 상하게 하였다.
- 『肅宗實錄』 5권, 肅宗 2年 8月 22日 壬申 1번째 기사(1676년) -

우리에게 있어 괘불은 자연재해와 질병, 기아와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자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는 불화로, 각종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다.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난은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상 자연현상 기록이 16~18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에 사찰에서는 불교 의식을 거행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사찰 마당에 건 괘불 속 부처님의 모습은 늘 그렇듯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대중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해 주었다.

괘불이 조성된 지 수백 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많은 재난과 맞닥뜨리고 있다.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었고, 이상기후와 전쟁, 사회 양극화 등으로 세계 곳곳이 신음하고 있다. 그동안 괘불은 크기와 의식용 불화로서의 성격 등으로 인해 일반인이 직접 볼 기회가 흔치 않았다. 요즘은 문화재로 지정된 괘불들이 사찰이 아닌 박물관에서도 많이 전시되고 있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사찰을 찾아가 괘불 속 부처님의 힘을 빌려 현세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듯이 우리도 거대하지만 온화한 부처님을 보면서 지친 마음을 위로받고 새로운 일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었으면 한다.  글. 김명주(국립문화재연구원 미술문화재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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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