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2

우리 제사상에 놓이는 일본 술 청주

근대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2

전통 음식과 식재료의 변화

1876년 개항 이후. 서양,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재래 음식의 변화, 외래 음식의 전래, 새로운 형태의 음식점 형성 등 우리의 실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신문을 살펴보며 우리의 음식이 어떻게 변화 되어 왔는지 알아보자


우리 제사상에 놓이는 일본 술 청주

찐 곡식에 누룩과 물을 넣고 발효시킨 뒤 걸러서 떠낸 맑은 술을 청주라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청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만든 술을 의미했다. 청주의 상품명이 정종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청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청주는 조선사람들이 양조하는 탁주나 약주에 비해 낮은 세금을 받았고 조선총독부가 생산을 장려하여 많은 양이 생산되었다. 조선술보다 낮은 가격으로 대량생산되었으므로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한국인들이 제사지낼 때 올리는 술이 되었다.

청주의 사전적 의미는 곡식을 찐 것에 누룩과 물을 넣고 발효시킨 술을 걸러서 맑은 부분만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청주는 일본술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만드는 술을 탁주, 약주, 소주라 불렀고 일본인이 만드는 술을 청주라고 하였다. 조선인이 만드는 약주는 처음 만들어진 술의 맑은 부분만을 걸러서 분리한 것이어서 사전적으로는 청주였지만, 청주는 일본술이라는 의미로 쓰였기에 약주라고 지칭한 것이다.


                                       1924년 2월 5일 조선의 주류 양조일본주 5만석(동아일보)

청주 중 ‘국정종’이나 ‘사꾸라정종’처럼 ‘○○정종’이라는 상품명이 있었다. 그래서 청주의 상품명인 ‘정종’이 청주의 대명사로 쓰였다. 일본은 발효를 과학화하여 발효주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청주 역시 일본의 공장에서 대규모로 만들어졌다. 그러던 것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한국땅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청주가 대량생산된다.

이런 상황을 『동아일보』1924년 2월 5일 「조선의 주류 양조일본주 5만석」이라는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의 주류는 약주, 탁주, 백주, 소주, 과하주, 이강주, 감홍로, 송순주 등 종류는 과다하나 주요한 것은 약주, 백주, 탁주, 소주, 과하주 등이며 수요자도 많고 양조량도 많다. ... 근래에 다수히 수용되는 것은 일본인이 양조하는 청주인데 더욱이 경성, 인천, 부산, 마산 등의 주요 양조지에서는 대규모의 설비를 하고 경영하는 자가 많은바 조선은 원료가 저렴하고 노동임금이 저렴하며 부패의 염려가 없는 모든 조건을 구비하여 있음으로 대정 11년의 일본인 양조 청주는 57600석에 달한다.’

1923년 한 해 동안 인천에서만 팔린 술 중 청주는 ‘백확’이 1014석 5두 7승, ‘국정종’이 225석 2두 9승, 기타 32종으로 도합 2966석 1두 8승이었다. 청주는 조선총독부의 장려와 판매로 확충으로 생산량이 점점 증가하였다. 마산의 경우 주류제조장이 조선인 125처, 일본인 13처인데 일본인이 생산하는 술은 정종 즉 청주였다. 생산량을 보면 조선인이 생산하는 탁주가 6700석, 약주가 1석, 소주가 15석인 것에 비해 일본인이 생산하는 청주가 6445석이었다. 마산부는 청주의 제조를 장려하고 판매로도 확장시켜주었다.(『동아일보』1925.12.26 「영남지방」)

청주는 생산과 판매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았지만 맛이 조선술보다 좋았던지 조선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동아일보』1922년 12월 21일 「조선사람은 엇지하면 살고」라는 기사에서는 외국으로 돈이 나가는 정종을 사먹지 말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제사용 술로 청주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사람들이 일본술인 청주를 제사술로 사용하게 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이 양조하는 약주에 대한 세금이 높아지고 자가용 술제조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제사에 술은 꼭 사용해야 했는데, 집에서 술을 담그지 못하게 하니 약주와 비슷한 청주를 사서 쓰게 된 것이다. 조선인이 만든 약주가 많던 시절부터 조선사람들 중 청주를 제사술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아일보』1925년 5월 11일 「처처편편」에서는 공주에서 42전어치 청주를 제사술로 쓰려고 외상으로 사간 후 이를 갚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사람들이 크게 싸운 기사가 났다.

                                1922년 1월 14일 일석미만 주표소지자 시내에 322명(사진출처:동아일보)


처음에는 1석미만으로 집에서 양조하는 건 허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마저 금지되었다. 그 이유는 1석미만의 면허를 내주면 실제 집에서는 2석 이상을 양조한다는 것이었다. 1922년 현재 경성부에는 1석 미만 자가용 양조권이 있는 사람은 322명이지만 이들은 모두 대정7년(1918) 이전에 양조권을 얻었고 이후에는 전혀 허가가 없었다.(『동아일보』1922.01.14. 「일석미만 주표소지자 시내에 322명」) 자가용 양조자들에게 면허를 주지 않으면서 자가용 양조자들의 수는 줄어갔다.

약주에 대한 세금도 일본술에 비해 상당히 많았다. 1929년 현재 양주는 처음 빚을 때 1석에 10원의 세금을 받았다. 그런데 실제로 빚은 1석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 아니라 관리가 1석일 것으로 추정하여 세금을 매기므로 항상 실제 만든 석수이상의 세금을 물었다. 또한 약주는 일본술인 청주에 비해 잘 상했는데 저장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술이었다. 그런데 세금은 약주가 상한 것에 대해 세금을 감해주지 않았다. 일본술인 청주는 상한 술은 세금을 감해주었다. 과다한 세금과 빈약한 자본, 유치한 기술에 음주가의 기호변화로 약주의 판매는 활기를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당국의 술에 대한 세금 표준은 기술이 발달한 대량 생산자를 표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약주는 이러한 세금제 하에서 많은 세금을 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약주 양조를 폐지하는 양조업자가 경향간에 만히 생기게되었다고 한다.(『동아일보』1929.01.31. 「과세율 과중등으로 약주양조계 공황」)

과다한 세금으로 약주의 판매가가 오를 수밖에 없는데, 약주에 비하면 청주는 가격이 쌌다. 그리하여 제사를 지내는 조선 사람들이 청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강문석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