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를 매혹시킨 커피

커피는 개항이후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서양인을 접대할 때 사용되었다. 고종은 커피를 상당히 좋아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커피를 가지고 한국에 왔는데 한국인에게 대접하기도 하였다.

고종황제를 매혹시킨 커피
개항 이후 들어온 음식과 식재료

* 커피의 유래
기원전 6~7세기 경 에티오피아에 칼디라는 목동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염소가 빨간 열매를 먹더니 진정을 못하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밤에는 잠도 못자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직접 빨간 열매를 먹어보니 잠도 쫓고, 기분도 좋아지는 것을 느껴 수도사들에게 이 열매를 가져다주었고 그로인해 널리 퍼지게 됐다는 '칼디의 전설'이 있지만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기록은 900년경이며 약이나 종교 의식에 쓰였다고 한다.


커피는 개항이후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 서양인을 접대할 때 사용되었다. 고종은 커피를 상당히 좋아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커피를 가지고 한국에 왔는데 한국인에게 대접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커피는 일반인들에게 많이 퍼져서 1930년대 후반에는 다방도 많이 생겼다. 이 시기 커피는 원두를 갈아 주전자에 끓여 체에 받쳐걸러 먹었다. 1930년대 후반 전쟁으로 수입이 통제되면서 커피의 사용은 줄어들었다.

커피는 서구에서 식후나 오후에 마시는 음료이다. 식후에 커피 마시는 것이 식습관이 되어서, 개항기 조선에 오는 서구인 특히 선교사나 탐험가들은 커피를 가져왔다. 영국인은 녹차나 홍차를 가져왔다. 1876년 개항 이후 서구와 접촉한 조선왕실은 궁에 커피를 마련하고 서양인들을 대접하였다. 1894년 무렵 조선에 와서 경복궁에서 명성왕후를 만난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는 오후에 궁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정중히 대접받았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이었는데 수프를 포함해 생선, 퀘일, 들오리 요리와 꿩 요리, 과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이 나왔다고 하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살림출판사, 1994.)

선교사들도 조선 땅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조선인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1889년 3월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의사 릴리아스 홀턴이 결혼하여 압록강 내륙 지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전도를 목적으로 한 신혼여행이었는데, 평안북도 강계에서 위원으로 오는 길에 도둑을 만나 짐 일부를 뺏기고 수행원이 부상 당했다. 위원에서 그 곳의 원님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은 부부는 빼앗긴 짐도 찾고 도둑도 잡게 되었다. 감사한 마음에 이 부부는 위원을 떠나기 전, 고을 원님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언더우드 부부가 만든 음식은 스프를 포함해서 생선, 화관과 딸기로 장식을 하고 사과소스를 치고 감자를 채워놓은 기막히게 맛좋은 새끼돼지구이, 밤과 양파 등의 여섯 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 부부는 새로운 진기한 음식을 내놓았는데, 그것을 꿀을 탄 커피였다.(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지음, 김철 옮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 이숲출판사, 2008.)

개항기 초기 커피는 가게에서 판매하는 음료라기보다는 궁궐에서 서양인을 접대하는 음료였다. 경복궁에서 서양인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던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정관헌을 짓고 서양인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고종은 커피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김홍륙이라는 신하가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커피에 아편을 넣었다가 발각된 일도 있었다. 인천의 대불호텔이나 정동의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서양인들이 묵는 곳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커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커피는 일제 강점기에 이르면 조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다방도 많이 생겼고, 상점에서 판매도 많이 되었다. 커피를 판매하던 다방은 1930년대 후반 많이 생겼는데 이것을 『동아일보』1936년 3월 4일자 「춘일수상(1) 홍차한잔의 윤리」라는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울 올 때마다 눈에 띄는 것은 다방의 발전이다. 그 양적 발전뿐만 아니라 장치나 음악도 여간 고급화 되지 않았다. 6-7년 전만 해도 서울에 순 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없어 동경서 끽다취미가 있던 학생의 불만이 되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급속도의 발전이다. 다방에서 나의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초저녁부터 가득 차있는 젊은 손님들이다.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세상을 잊고 있지 않은가.’


1935년 11월 22일 이렇게 하면 일층 더 맛이 있는 커피차의 이야기(사진출처:동아일보)

신문에 커피를 사는 법도 소개되었는데 이 시기 커피는 원두를 갈아서 가루로 팔았다. 정월 초순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서 접대할 때를 위해 커피를 사는데 커피 품질은 남미 모카가 제일이고 다음으로 자바, 브라질산이었다. 살 때는 신용있는 가게에서 보고 있는 데서 갈아달라고 하고 그렇지 못하면 신용 있는 상점의 상표를 보아 사도록 하라고 하였다. 싼 커피는 가금나무 뿌리, 콩, 나뭇잎 껍질 같은 것을 가루로 만들어 넣는 일이 있으므로, 분별하려면 컵에 물을 넣고 커피를 넣어 전부가 가볍게 떠오르는지 알아보라고 하였다. 전부가 가볍게 떠올라야 좋은 커피인 것이다. (『동아일보』1934.12.27 「커피, 코코아, 홍차 사는 법과 택하는 법」)


일제강점기 원두커피가 판매되었으나 원두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구가 있던 것은 아니어서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커피차 끓이는 요령을 말하고 있다. ‘아마 지금 우리가 보통 쓰고 있는 것은 부라질이나 자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다. ... 이상적으로 끓이는 법은 한 컵의 분량에 찻술로 커피가루 셋 비례로 넣는데 먼저 물을 펄펄 끓이고 커피를 분량대로 넣는 동시에 불을 약하게 하면서 5-6회를 저으면서 다시 끓어오르거든 불을 끄고 2-3분 그대로 두었다가 커피가루가 가라앉거든 차 거르는데 걸러서 씁니다. ... ’(『동아일보』1935.11.22. 「이렇게 하면 일층 더 맛이 있는 커피차의 이야기」)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남경을 함락시키면서 중국과의 전쟁이 가속화된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물자가 통제되는데, 커피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수출에 제한을 받는다. 1939년에는 대만산 커피가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나 생산이 많지 않았다.(『동아일보』1939.04.22 「대만산 커피」)


6·25전쟁으로 대중화된 인스턴트커피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는 사실 원두커피보단 전세계 유일무이! 해외 바리스타들도 극찬한 '커피믹스'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국내에 커피가 대중화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커피믹스는 대형마트에서 라면을 제치고 당당히 판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커피믹스는 언제, 어디서부터 등장 했을까?

6.25 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보급품으로 들어오던 인스턴트 커피가 국내에 풀리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중들은 다방에서 커피를 접할 수 있게 됐는데 60년대 초반 커피는 외화를 축내는 공적으로 몰려 수입이 중지되고 다방에서도 커피를 못 팔도록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60년대 후반, 수입 제한 품목이라 미군을 통해서만 들어오던 커피를 국가 차원에서 허가를 내주고, 국내에 커피 공장이 지어져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커피 회사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1978년 커피 자판기의 등장은 다방에 가지 않아도 마실 수 있는 장점으로 더욱 퍼지게 된 계기가 된다. 아직까지도 인스턴트 커피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1999년 이화여대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생기며 원두커피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그 후 원두커피 시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인스턴트 커피 시장을 위협하자 그에 대응해 요즘에는 원두커피 못지않은 제품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인스턴트커피가 전해지면서 커피가 대중화된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음용된 것은 1885년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아펜젤러가 대불호텔에서 머물렀을 때 그곳에서는 서양코스 요리를 팔았는데 먹을만 했다는 기록에서부터 시작된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기록이다. 그 후 8·15광복과 6·25전쟁 시기에 미군 보급품 통하여 인스턴트커피가 급속히 보급되어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6.25전쟁 당시 미군들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국내에 크게 전파되어 대중화된다. 참전 군인들은 유엔군 보급품목 중 하나였던 인스턴트커피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미군들은 한국인들에게 껌, 초콜릿 등 먹을 것을 많이 나눠주었는데 그때 인스턴트커피도 함께 나눠 주면서 대중들에게 커피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음용된 것은 1885년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아펜젤러가 대불호텔에서 머물렀을 때 그곳에서는 서양코스 요리를 팔았다는데 먹을 만했다는 기록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더 많이 알려진 것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기록이다. 그 후 8·15광복과 6·25전쟁 시기에 미군 보급품을 통하여 커피가 급속히 보급되어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커피가 처음 판매 될 당시에는 값이 너무나 비싸 부유한 사람만이 마실 수 있었고, 해방 전까지는 주로 지식인, 예술인, 관료층 등 일부의 사람들만이 다방을 이용했다. 6·25전쟁 발발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1회용 인스턴트커피가 보급되어 무질서하게 유출됨으로써 일반화되어 대중들이 즐기는 기호음료로 정착하게 된다.

인스턴트커피는 1889년경 미국계 일본인 ‘가토 사토리’에 의해 발명되어, 1901년 미국뉴욕에서 개최한 박람회에서 녹는 커피(Soluble coffee)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후 인스턴트커피의 대량생산은 1938년경 브라질에서 커피가 과잉생산 되자 재고처리를 위하여 식품기업 네슬레(Nestle)에 재고 방안을 요청하여 '네스카페'라는 인스턴트커피를 개발해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한다. 인스턴트커피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다. 여러 기구를 사용해야 하는 원두커피와 달리 물에 녹이면 바로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의 간편함은 전장에서 유효했으므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6·25전쟁 당시에도 그 편리성과 보관의 용이함,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들의 기호를 사로잡았다.

1964년 새로운 커피 가공 기술인 동결건조법의 등장으로 인스턴트커피의 맛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다. 이후 1970년 우리나라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생산하게 되었고, 1976년 동서식품에서 세계 최초로 일회용낱개 포장의 커피믹스를 개발해 출시하면서 한 때 우리나라 전체 커피시장의 90%를 인스턴트커피가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현재 세계 제일의 믹스커피 제조기술을 지닌 우리나라는 그 종류도 다양하게 발매하고 있다.




구한말 우리나라에도 커피가 전해지게 된다.

근, 현대사에 꼭 나오는 '아관파천'
1896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간 머물게 된다.
그 때 처음으로 커피를 접하게 되고 그 맛을 잊지 못해 환궁한 뒤 덕수궁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집을 짓고 그 곳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신하들에게 권하거나 하사도 하였다고 한다. 커피(Coffee)는 중국식 발음으로 '가베' 혹은 탕약과 비슷하나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 하여 '양탕국'이라 불렸다.

고종황제와 정관헌



처음 등장한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 유학생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등장하는데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라고 기록했다. 고종황제는 커피 사랑으로 커피에 독약을 타서 암살의 위협을 받은적도 있는데 평소 향을 먼저 즐기고 커피를 마셨던 습관 덕분에 평소와 다른 커피의 향을 느끼고 암살의 위협을 피했으나 태자(순조)는 그를 모르고 마셨다가 바로 뱉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입안에 여독으로 인해 치아를 18개나 잃었다고 한다.


유길준 / 서유견문록



후에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던 손탁이라는 독일인에게 정동 사옥을 하사 하는데 그 곳에 손탁 호텔을 짓고 1층에 들어선 '정동구락부'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로써 민간인들에게 커피가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손탁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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