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기록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도 좋지만, 왜 그것이 세계적인 것인지, 왜 유네스코와 세계인이 함께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고 그 가치를 향유 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갖지 못한 것과 다름 없을 우리의 기록 유산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가지지 못한 것과 실질적으로 다름이 없다. 세계적인 기록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도 좋지만, 왜 그것이 세계적인 것인지, 왜 유네스코와 세계인이 함께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고 그 가치를 향유 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조상들이 유산을 편찬한 뜻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조상의 지혜와 슬기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풍요롭고 정의롭고 아름다워지리라.
00. 훈민정음 용자례 Ⓒ국가유산청 / 01.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국립고궁박물관
02. 승정원일기 Ⓒ국가유산청 / 03. 동의보감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유산은 고문서와 책의 형태로 시작했지만, 유네스코는 이를 ‘Memory of the World’라 부른다. 기억에 방점이 찍혀 있다. 유형, 무형유산과 달리 기록은 모든 유산의 의미와 맥락을 밝혀주는 기반이다. 거대한 건축물이나 의례, 공예품도 기록이 없다면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기록과 기억은 유산을 유산답게 만드는 핵심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 기록문화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는 제국주의적 담론에 기댄 잘못된 인식이었다. 현재 한국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건수만 해도 한국이 20건, 일본은 9건, 중국은 18건이다. 독일,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는 우리보다 많거나 같지만, 등재 수가 곧 문화 수준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록 유산을 얼마나 알고 활용하느냐는 점이다. 등재만 자랑스러워하기보다 이를 통해 삶을 아름답고 슬기롭고 너그럽고 평화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동의보감은 왜 세계 기록 유산이 되었을까? 흔히 서양 의학에 견줄 만한 한의학의 우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유네스코가 주목한 본질은 다르다. 동의보감은 17세기 조선이 국민 건강 증진이라는 뚜렷한 목표 아래 당대 의학 지식을 수집·정리하여 보급한 기록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내용에는 중국 의서의 인용이나 요약이 많고, 때로는 배우자의 사랑을 되찾는 처방이나 위험한 약재 사용처럼 허무맹랑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조선이 전국적으로 인력과 시설을 늘리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지식을 집대성해 국민이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 국가 주도의 공공 의료가 19세기에 등장한 것과 비교하면, 동의보감은 훨씬 앞선 시대에 보건 의식을 기록으로 남긴 사례라 할 수 있다.04 / 05 조선통신사기록물 중 인조 14년 통신사입강호성도 (왼쪽)와 부용안도 병풍(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한글은 국민이 소통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창제된 독창적 문자다. 말하는 속도를 거의 따라가며 기계식 타자기나 워드프로세서 입력이 가능한 문자는 전 세계적으로 드물다. 로마자 알파벳, 키릴문자, 아랍문자가 이에 속하지만 모두 페니키아 문자 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비해 한글은 기원을 전혀 달리하는 새로 창제된 문자로 세계사적 중요성과 독창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 사실을 확실히 증명해 준 것은 훈민정음(해례본)이었다. 창제자와 원리가 기록된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만약 훈민정음(해례본)이 전하지 않았다면 세종대왕이 한자나 몽골 문자에서 차용했다는 설이 여전히 퍼졌을지도 모른다. 훈민정음(해례본)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신문 연재와 연구서 출간을 거쳐 학계에 알려졌고, 광복 후 1946년 조선어 학회가 영인본을 펴내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해졌다. 간송은 6, 25 전쟁 중에도 이를 지켜냈으며,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 훈민정음 해례본 : 세종대왕이 작성한 훈민정음의 원본이다. 세종이 창제한 글자인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운용법 등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다.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 혹은 훈민정음 원본이라 한다. 해례는 보기를 들어 내용을 풀이한다는 뜻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처럼 유산은 간직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문가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훈민정음(해례본)은 운 좋게 보존되었지만 그밖에 수많은 전적은 혼란 속에 폐지나 포장지, 불쏘시개로 사라졌다.06. 동의보감에 수록된 인체 장기에 관한 도상 Ⓒ한국학중앙연구원
07. 훈민정음 용자례 Ⓒ국가유산포털 / 08. 승정원일기 Ⓒ국가유산포털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권력 남용이 아니라 은폐, 거짓, 기록의 조작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통치 자료가 아니라 권력자의 언행을 사실대로 기록해 후세에 전하려는 의지를 담았다. 조상들은 정치가 올바로 행해져야 한다고 믿었고, 진실의 힘을 확신했다. 오늘 권력의 횡포를 막지 못하더라도 후세가 알게 된다면 권력자도 자제할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권력은 기록을 꺼렸고 폭력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관은 기록하지 말라라는 왕의 명령조차 기록할 만큼 지식인의 결기와 사명감도 빛났다. 반면 무오사화 처럼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 과정에서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승정원 일기는 승정원이 왕의 언행과 신하들 사이의 대화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등재 당시 중복 논란이 있었지만, 실록이 사후 편찬된 역사라면 일기는 당대의 1차 기록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등재됐다.
두 기록물은 수난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조선왕조실록은 네 질로 나누어 보관했지만 화재와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전주사고본 만이 민간의 노력으로 피란하며 보존되었다. 이후 다시 네 사고 체제로 유지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6, 25전쟁으로도 피해를 보았다. 승정원일기 역시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으로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또한 두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작성되어 과거에는 전문가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명, 청대 실록보다 훨씬 엄격하게 작성되었고 다양한 분야를 담아 자료적 가치가 높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미 완역과 인터넷 공개로 연구 기반이 마련되었고, 오류를 수정한 새 번역도 진행 중이다.
승정원일기는 초서라 읽기 어려워 오랫동안 접근이 제한되었으나, 17년간의 탈초 작업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거쳐 현재 번역이 진행 중이다. 2024년 기준 37%가 번역되었으며, 2048년쯤 완료될 예정이다.
승정원 일기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면 역사와 문화 연구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할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이처럼 국왕의 언행을 기록하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기록 유산에 담긴 문화적 관습과 실용적인 가치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09. 조선통신사기록물 중 달마절노도강도(김명국)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전 세계 120개국 570건의 세계기록유산 가운데 유네스코의 설립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라 자부해도 좋다. 특히 발굴과 연구, 국제공동등재가 민간단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네스코는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뒤 평화는 인간의 마음속에 세워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쟁은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되며, 정부 간 정치·경제적 합의만으로는 진정한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평화는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유네스코의 정신이다.
조선통신사는 바로 그런 목적에 부합했다. 공식 외교사절단이었지만 문화교류에 무게를 두었고, 일본에 지식인층이 성장하면서 비공식 교류도 활발해졌다. 막부와 대마도번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공식 교류가 상당히 활발해졌다. 이를 통해 양국 사람들은 상호 이해와 존경을 나누었다. 일본의 학문과 예술은 자극을 받았고, 조선 역시 일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다만 20년에 한 번 꼴의 드문 교류였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게다가 재정난 등으로 교류가 끊긴 사이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를 압박했고, 양국 관계는 무지와 편견, 폭력과 긴장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했지만, 결국 태평양전쟁의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
조선통신사기록물은 문화와 예술의 교류가 편견을 극복하고 이해와 우정을 낳았던 경험을 전한다. 동시에 평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멈추면 어떤 비극이 닥치는지도 일깨운다. 이 기록은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의 가치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출처(한경구, 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세계유산분과 문화유산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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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