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1

나물 요리에서 중국식 당면 요리로 변한 잡채

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1

전통 음식과 식재료의 변화

1876년 개항 이후. 서양,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재래 음식의 변화, 외래 음식의 전래, 새로운 형태의 음식점 형성 등 우리의 실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신문을 살펴보며 우리의 음식이 어떻게 변화 되어 왔는지 알아보자


나물 요리에서 중국식 당면 요리로 변한 잡채

조선 시대에도 잡채가 있었는데 오늘날처럼 당면이 들어간 것은 아니고 다양한 채소를 요리한 음식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만드는 법이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의 잡채의 원조는 임오군란 이후 한국에 온 중국인들이 중국 음식점에서 만든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당면 생산이 늘어나면서 한국인들도 당면을 사용해 요리를 만들게 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요리가 잡채였다. 중일전쟁 후 한국에 있던 화교들이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중국집에서 팔던 잡채는 한국의 가정 요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잡채는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요리였다. 광해군 때 이충(李沖)이란 사람이 궁에서 잔치를 열 때 잡채를 바쳐서 왕의 환심을 사 호조판서가 되었다고 한다. 이충이 바친 잡채에는 오늘날 같은 당면은 들어가지 않았다. 당면은 개항기 이후 중국 동북 지방에 있던 것이 한국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잡채를 한자 뜻대로 해석하면 다양한 나물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충이 임금님께 바친 잡채가 여러 나물을 섞어 놓았던 것 일리는 없고 뭔가 조리법이 있었을 테지만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1921년 6월 1일 제일루에 중대범(사진출처:동아일보)

일제강점기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집에는 ‘잡채’라는 메뉴가 있었다. 『동아일보』 1921년 6월 1일 「제일루에 중대범」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일본인 형사들이 지난 29일 밤10시경 종로통 2정목 46번지 중국요리집 제일루 2층 길가로 향한 4호방에서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했던 사람들을 체포했다고 나왔다. 체포당한 사람들은 잡채 한 접시와 배갈을 주문했다. 이 시기 중식당 메뉴로 잡채가 있었던 것이다.

                                                                         잡채

1921년에 출판된 방신영(1890~1977)의 『조리요리제법』에는 잡채 만드는 법이 나온다.
“도라지·미나리·황화채·제육·표고·버섯을 채져 담고 파를 이겨 넣은 후 간장과 기름과 깨소금 후춧가루를 쳐서 한참 섞어 가지고 기름에 볶아 내어 당면을 물에 불려 삶아 가지고 썰어서 다 함께 담고 잘 섞어서 접시에 소복이 담은 후 알고명 채치고 표고 석이버섯을 물려서 실과 같이 잘게 채쳐 기름에 볶아 가지고 맨 위에 뿌리고 또 잣가루를 그 위에 뿌리느니라.”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에 살던 중국인들이 대거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당면을 넣은 잡채요리는 가정에서 만드는 요리가 되었다. 경성에 있던 중국요리집 292군데 가운데 237군데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중국집의 잡채를 맛보기 힘들어진 까닭이다.

                               1937년 9월 19 일 부내 지나요리점 팔할이상이 폐휴업(사진출처:동아일보)

‘지나사변 발발 이후 조선 내에 있는 지나인이 이미 3만 명이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함은 기보한바 이어니와...특히 요리업자의 철귀는 우동, 잡채, 탕수육 이렇게 입에 붙은 말같이 되도록 대중음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이와 같이 292개중 철귀한 것이 237, 현재 개업중인 것이 57로,...그렇게도 많은 호떡집은 거의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런 것을 말미암아 우리 미각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고 또한 경영 당국으로 본 요리 업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동아일보』1937.09.19 「부내 지나 요리점 팔할이상이 폐휴업」)

해방 후 잡채는 중국집을 벗어나 분식집에서도 팔게 되는데, 1970년대에는 명동 등 번화가의 스낵코너에서 잡채가 팔리기도 했다.(『경향신문』1975.02.07 「번화가 파고드는 스낵코너」) 한국 가정에서 잡채는 대표적인 잔치 요리로 자리매김했다. 여름철에는 잡채 등 음식이 상해서 식중독에 걸린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신문에 보인다.

잡채는 재료 가격이 싸다. 당면도 싸고, 흔한 야채를 써도 어느 정도 맛을 낼 수 있다. 그 덕분에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며 명절이나 잔치 음식으로 정착했고, 분식집 메뉴나 스낵코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출처:종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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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