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 해산(大韓帝國軍 解散)

대한제국군 해산(大韓帝國軍 解散)이란,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군대 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대한제국군 해산(大韓帝國軍 解散)

115년 전 오늘은(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조칙이 내려진 날이다.

대한제국군 해산(大韓帝國軍 解散)이란,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군대 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서울의 군대를 시작으로 하여, 8월 1일에서 9월 3일에 걸쳐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후에 순종 황제의 조칙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첨부되고 있던 비밀각서에 의거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은 대한제국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게 한 다음,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는데, 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짐(朕)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재 우리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 제도를 쇄신할 생각 아래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계급에 따라 은금(恩金)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將校), 하사(下士),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본받아 각기 자기 업무에 나아가 허물이 없도록 꾀하라.”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統監)에게 의뢰하라.” 하였다.

이어서 8월 1일 한양에서부터 군대해산을 결행하였다. 일본은 7월 31일 밤, 미리 군대해산의 칙서를 작성해 놓고는 이완용을 시켜 다음과 같은 '조회문'을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보내도록 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버팀목이라 할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허수아비 내각 수반인 이완용의 '조회문'을 통해 추진하는 수법을 썼다.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처럼 꾸며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른바 황제의 하사금이라는 것도 나누어 주었다. 하사에게는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졸에게는 50원, 1년 미만 근무한 병졸에게는 25원 씩이 지불되었다.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에 동대문 훈련원에서, 맨손 훈련을 한다고 병사와 장교를 소집해 놓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의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그 후 즉석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을 떼었다. 주위는 이미 일본군 헌병이 중무장한채 도열, 병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 해산은 8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 (현재 소령,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복장)이 추서되었고, 2003년 8월의 호국인물로도 선정되었다)이 자살하면서 유서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 2개 대대가 대대장 박승환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켜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며 대한제국 마지막 군대로서 일본에 저항하고, 또 저항했다. 박승환과 그의 부하들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들의 불꽃 같은 투쟁은 훗날로 이어져 이후 전개된 의병 투쟁의 시초가 됐다.


남대문 전투는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저항하여 대한제국 군대가 반발, 교전을 벌인 전투다. 대한제국군 최대의 전투이자 한양이 수도가 된 이래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한양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였다.


                                                   남대문전투 채색 석판화, 프랑스 ‘르프티 주르날’ 1907년 8월 4일자 발행


                               대한제국군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과  tvn드라마  미스터션사인 

                              박승환 참령의 순국화 (사진 독립기념관)

                                조선의 구식군대, 구식경찰이다 이분들도 일제와 싸웠고 많은분들이 학살되었고 훗날 독립에 투신하게 된다.
                                 (홍범도 장군은 구식군대 나팔수(오늘날의 하사관) 였다  사진 독립기념관


                                      신식군대 (사진 독립기념관)

                                                강화진위대 장교단. 앞줄 가운데는 훗날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는 이동휘 참령이다                                  



사진은 일본군에 학살된 조선의 군, 경찰들 (훈련도감-대한제국군, 포도청-순검부 라고도 부른다) 일본군이 조선의 군대(훈련도감, 지방부대) 경찰(포도청, 지방관아) 을 강제해산하자 그들은 무기고를 전국각지에서 항쟁한다

20세기 초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할 당시의 대한제국의 총 군 병력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궁성과 황성 시위 병력인 시위대는 4000명 이. 이후 1909년 친위부를 설립하였고, 초대 대신은 군무대신이었던 이병무가 되었다. 이병무는 시종무관장으로 격하되어 유명무실한 친위부를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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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