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하는 일에 어찌 내 한 몸을 아끼겠는가? …… 비록 가벼운 감기에 걸리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백성의 고단함을 생각한 조선 시대의 나랏 일 국정의 현장을 기록한 국보『 승정원 일기』
조선왕조의 심장부에서 매일같이 쏟아지는 왕명의 출납과 국정의 현안 등 ‘나랏일’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승정원일기』. 그 방대한 기록의 행간에는 나라의운명을 짊어진 국왕의 고뇌와 이를 쉼 없이 받아 적어야 했던 주서(注書)들의 치열함이 공존한다. 특히 1733년 겨울의 기록에서는 영조와 신료들이 밤늦도록 마주 앉아 군역의 폐단을 논하며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고자 했던 국정의 현장을 엿볼 수 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엄중한 일의 무게와 이를 정직하게 기록해 낸 붓끝의 사명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승정원일기 Ⓒ국가유산포털
1733년(영조 9) 12월 19일(양력 1734년 1월 23일) 『승정원일기』의 마지막 문장이다.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승정원이 날짜 별로 작성한 업무 기록인 『승정원일기』는 날짜와 날씨, 승정원 관원의 근무 현황, 국왕의 소재를 먼저 기록하고, 출납한 문서를 차례로 기록하였다. 또한 그날 국왕이 참석한 회의, 의례 등이 있으면 시간, 장소, 행사의 명칭, 참석자 명단, 주고받은 대화를 포함한 행사 전반을 상세히 기록한 연설(筵說)을 별도의 장에 적었다. 연설은 그 자리에 참석한 승정원 주서(注書)가 작성하였는데, 연설 작성은 주서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주서는 행사의 절차나 논의 내용 등을 초책(草冊)이라는 일종의 공책에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다가 정서(淨書)하여 제출하였다. 추후에 정리한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주고받는 대화를 한문으로 기록해야 하므로, 빠르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능력은 필수여서 주서는 문과(文科) 급제자만 임명하는 관직이었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밤은 이미 이경(二更)이었다.”
밤 이경(오후 9~11시)이 되어서야 끝난 이 자리는 사시(오전 9~11시)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부근의 별저상에서 열린 경연(經筵)의 일종인 소대(召對)였다. 중간에 잠시 물러가라는 명을 받고 나왔다가 신시(오후 3~5시)에 다시 모였으므로 소대의 전체 시간을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오전 11시 이전에 시작한 소대가 밤 9시 넘어서야 끝났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7시간 이상 이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이날 소대 기록은 원문 20장에 빼곡히 적혀 있는데, 한자로는 9,570자, 번역문은 원고지 155장이나 된다. 『영조실록』의 같은 날 기사는 영조와 박문수의 대화를 위주로 중요한 내용만 요약하여 1,515자로 기록하였는데 『승정원일기』와 비교해 보면 1/6 정도이고, 소대 내용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승정원일기』 해당 기사에도 실제 소대 내용은 전체의 1/10밖에 되지 않으니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한 비변사 당상 박문수와 영조가 함께 논의한 당시의 국정 현안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01. 승정원 일기 Ⓒ국가유산포털 / 02. 1733. 12. 19일의 기록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사직(辭職)하여 얼마 전에 교체된 박문수는 오랜만에 영조를 만나 자신의 생각을 남김없이 피력하였고, 영조와 함께 군역(軍役)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안 등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영조는 당시의 상황을 좋은 옷을 입고 굶주리는 것과 같다며 겉으로는 괜찮은 듯하지만 속은 텅 비었다고 진단하고, 사치는 나라가 망하는 근본적인 원인이고 이를 바로잡는 책임이 윗사람에게 있다고 말하였다.ㅜ이날의 논의는 이튿날 차대(次對)에서 계속됐다. 차대는 5일마다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 삼사(三司)의 관원이 참석하여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승정원 승지와 주서, 사관도 당연히 참석하였다. 영조는 불참하겠다는 관원도 부르도록 승정원에 지시하고, 또 19일 박문수와 논의한 내용을 대신(大臣)이 알지 못하니 미리 듣고 충분히 상의한 후 차대에 나오라고 전교(傳敎)하였다.
03.1733. 12. 20일 / 04.1733. 12. 21일의 기록
20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희정당에서 열린 차대에는 영조를 비롯하여 좌의정과 우의정, 공조를 제외한 5조(曹)의 판서, 박문수 등 17명이 참석하였다. 차대에서는 각 지방에서 올린 장계(狀啓)와 그에 대한 비변사의 의견을 보고하며 관련한 현안을 논의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날은 전날 박문수와 한 논의를 이어서 군역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안을 먼저 논의하였다.
우의정 서명균과 좌의정 김흥경은 군역이 백성의 가장 큰 고통이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대안으로 거론되는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법(口錢法)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바로잡을 만한 좋은 계책이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는 “선왕 때에는 변통하려다가 미처 결행하지 못했어도 지탱할 수 있었지만 …… 선왕 때에도 변통할 수 없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양역(良役)을 변통하지 못하면 조선은 망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신하가 문제점을 주로 지적하는 가운데 호조판서 송인명은 대동세(大同稅)를 일부 줄이는 대신 결전(結錢)을 내게 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송인명은 대동법을 시행할 때도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결연히 시행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백성이 편리하게 여기고, 양전(量田)에 대해서도 논의가 엇갈렸지만 실제 행한 뒤에는 폐단이 없었다는 전례를 지적하면서 모든 논의가 통일되기를 기다린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양역(良役)은 양인(良人)이 부담하는 역(役)이라는 의미로 군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족징(族徵), 인징(隣徵) 등 군역의 폐단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의는 숙종 대부터 있었고, 영조 즉위 초에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안으로 제시된 호포, 결포 등의 단점이 부각되면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선 12월 9일에 영조는 소대에서 당(唐)나라 육지(陸贄)의 시무책(時務策) 등이 담긴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독하면서 재위 9년이 되도록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였다고 자신을 반성하고 정사에 진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신료들에게도 차대를 거르지 말고 여는 등 정무에 힘쓸 것을 요구하면서 국정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8일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논의하고 싶다며 현직에서 물러난 이광좌를 만났다. 이광좌는 9일에 내린 전교에 호응하여 “지금 백성은 지극히 곤궁하고 재정은 심하게 고갈되어 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전보다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자기 집안의 묘지기 5명이 굶어 죽었고, 지금 사는 마을이 70가구인데 죽은 사람이 20여 명이나 된다고 직접 겪은 민간의 상황을 알렸다. 또 삼남 바닷가 고을의 피해가 매우 커서 흥양(興陽)에서는 2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과장된 수치이겠지만 실제 죽은 사람이 5,000명을 밑돌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광좌는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영조에게 더 분발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정사에 힘쓰겠다는 영조의 다짐이 빈말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은 20일 차대에서 얼어 죽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추우니 1월 3일로 예정된 사직(社稷) 기곡제(祈穀祭)를 직접 지내지 말라는 우의정의 요청에 대한 영조의 대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조는 “백성을 위하는 일에 어찌 내 한 몸을 아끼겠는가? …… 비록 가벼운 감기에 걸리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라고 거절하였다.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비는 제사인 기곡제를 직접 지내겠다는 영조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얼어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한성부에 얼어 죽은 사람을 찾아보고 묻어 주거나 가족을 돌보아 주라고 지시하였다.
21일 각사의 당하관을 만나는 윤대(輪對)에서도 영조는 도승지 유엄과 양역을 변통하는 일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유엄은 20일 차대에서 양역에 관한 좋은 의견은 없었다고 평가하면서 좋은 방편을 결연히 시행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재용을 절약하도록 엄하게 신칙하고 모범을 보이기를 청하였다. 영조는 “나라의 치란(治亂)이 임금에게 달려 있다”라고 전제하고, 백성의 사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윗사람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면서 그 자리에서 사치를 금지하는 전교를 내렸다. 백성의 사치는 결국 왕궁을 본받은 것이라고 진단하고 몸소 검소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상의원(尙衣院)의 비단 짜는 베틀을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이는 균역법(均役法)은 1750년(영조26)에야 비로소 시행되었다. 비록 영조의 의지대로 곧바로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하였지만 1733년 12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의 『승정원일기』에는 백성이 도둑으로 변하는 것은 군역 부담을 견디지 못해서이고,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할 원인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치열하게 대안을 모색하던 영조와 신료들의 고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처 : 정영미(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