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6

경상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던 우두령 옛길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6

경상도를 남북으로 연결하던 우두령 옛길

영남지방이라 불리는 경상도는 19세기 말에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뉘었다.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구분하는 경계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경계 가운데 하나가 경상북도 김천시와 경상남도 거창군을 연결하는 우두령(牛頭嶺, 580m)이다. 이 고개는 소백산맥의 대덕산(大德山, 1,290m)에서 동쪽으로 가야산(伽倻山, 1,430m) 방면으로 뻗는 지맥(支脈) 중의 국사봉(國士峰, 875m)과 수도산(修道山, 1,317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우두령은 산의 모양이 소를 닮았다는 데에서 생겨난 이름으로, 소머리재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고갯길은 오래전부터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3개 도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길이며 통행량도 매우 많았다. 옛날에는 남해안의 삼천포(지금의 사천)에서 진주·산청·함양을 거쳐 우두령을 넘고, 다시 북쪽으로 김천·상주·점촌을 거쳐 문경새재[聞慶鳥嶺]에 이르는 남한의 중앙을 남북으로 직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도로교통이 발달한 현대에는 주변에 거주하는 농민이나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조그마한 길에 불과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역마가 다니던 경상우도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던 길이였다.

우두령 옛길은 조선 시대에 공공업무를 위해 개설되었던 역로 가운데 김천도(金泉道)에 편성되었던 장곡역(長谷驛)이 있던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장곡역은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 관기리에 있었으며, 역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머물던 관사가 있었다는 데에서 관터 또는 관기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장곡역은 고려시대에 두의곡역(頭依谷驛)이라 불렸다.

김천시 대덕면사무소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면 지방도 1099호선과 분기하는 지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지방도 1099호선을 따라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로 넘어가는 길에 우두령이 있다. 현재 이 구간을 통과하는 도로명은 우두령로이다. 과거에는 이 구간이 국도 3호선이었지만, 지금은 국도 3호선이 서쪽으로 우회한다. 이 길은 예전에 서울로 가는 버스가 다녔을 정도로 중요한 교통로였지만 국도 3호선이 우회 개통하면서 통행량이 줄었다. 지금은 차량 1대가 지날 수 있을 정도이며 자동차의 통행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두령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에서 비교적 고도가 낮은 고개였기에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두령은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민란이 발생하거나 전쟁이 발생하면 우두령을 차지하기 위한 많은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물리친 곳이고, 한국전쟁 때에는 후방에 고립된 빨치산이 우두령 일대에서 마을 주민들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양민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의 우두령 전투는 유명하다.

예로부터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고갯길이어서 고개를 넘는 길손들이 쉬어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쉬어가는 사람들에게 쉼터 역할을 하던 소지원(所旨院)이라는 관용 숙소가 우두령의 정상 아래의 덕석마(덕석 마을)라는 마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덕석마라는 마을은 우두령 북쪽의 국도 3호선과 지방도 1099호선이 분기하는 곳에 있는 김천시 대덕면 대리에 속했지만, 현재는 사라졌고 돌담과 집터만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우두령은 물줄기가 갈라지는 분수계이기도 하다. 우두령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감천이고,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황강으로 합류하는 계수천이다. 물줄기는 같은 물을 공유하는 사람이나 마을을 통합하는 기능이 있지만, 산줄기나 고개는 반대편에 자리한 두 마을을 갈라놓는다. 이렇게 본다면 우두령을 기준으로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가 설정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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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