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은 왜 '천남생'이 되었을까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은 왜 '천남생'이 되었을까?

 

요즘도 심심치 않게 사회지도층 인사 자녀들의 국적포기 문제가 논란이 되곤 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국적을 어느 나라로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국적 포기자들의 상당수가 대한민국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다른 국민들보다 더 많이 챙겨 누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짊어지는 의무는 지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 대다수의 힘없고 돈 없는 국민들이 그들의 행태에 열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적을 바꾼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다 있었을 것이다. 아니 국적을 바꿨다기 보다는 자기가 살던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국적 바꾸고도 여전히 그 나라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나라를 떠나야했던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떠난 경우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설 자리가 없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떠나야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고구려처럼 전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한 나라의 경우에는 전쟁 통에 포로가 되거나, 나라가 망해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고구려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 가운데 천남생(泉男生)과 천헌성(泉獻誠)이 있다. 이들은 그 출처를 대면 금방 알만한 인물이다. 천남생의 아버지는 너무나 유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천헌성은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천남생의 아들이다. 연개소문의 아들과 손자가 난데없이 천씨가 된 것은 당(唐)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연(淵)자를 피했기 때문이다. 《신당서(新唐書)》의 천남생 열전과 그들의 묘지명에 모두 '천남생', '천헌성'이라 되어 있다. 당나라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 탓에 죽어서도 연이라는 본래의 성씨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영광과 오욕의 연씨 집안 연대기

연씨 집안의 시조는 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연못 연(淵)자를 성씨로 한 것이다. 고대 시기에는 왕뿐 아니라 힘 있는 귀족 집안에서도 자기 집안의 신성함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식의 시조탄생설화를 가지고 있는 예가 많았다. 그렇더라도 물의 자손이라 자칭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 말기의 최고 권력층인 연개소문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朱蒙)은 태양신인 해모수와 물귀신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물의 후손을 자처한다는 것은 연씨 집안의 권위가 대단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개소문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이 고구려 후기에 새로 일어난 신흥귀족 집안 출신일 것으로 보고 있다. 남생의 묘지명에는 조상의 덕택으로 영화를 누렸다고만 되어있고, 천헌성의 묘지명에는 증조부인 대조(大祚)가 막리지로서 병권을 장악했고, 5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기세가 삼한을 제압했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연개소문전'에도 아버지가 동부(서부)대인이었다고 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로 보아 연개소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대에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집안의 설화가 두만강 유역 일대에 알려져 있었다고 하므로, 아마도 이 지역의 유력 토착세력이 6~7세기 대에 중앙정권으로 편입하는데 성공하면서 크게 성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연개소문 정도의 위상이라면 없던 설화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집안은 연개소문 아들 대에 와서 '연(淵)' 대신 '천(泉)'이란 성(姓)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집안의 영광도 '연못'에서 '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통일왕조인 수(隋)의 대대적인 침략을 훌륭하게 막아냈고, 칼칼한 태종(太宗)이 직접 이끌고 온 당나라 군대까지 물리쳤던 고구려가 마침내 멸망하게 되는데, 남생 부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 전 당으로 귀화한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인 연개소문이 권력의 최정점에 도달해 있던 650년(보장왕 9년)에 천헌성이 태어났다. 최고 권력자의 장손인 만큼 9세에 벌써 '선인(先人)'이란 관등을 받았다. 666년에 아버지인 남생이 막리지가 되고 지방순시를 나갔을 때 수행했던 것을 보면, 이때 벌써 관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헌성이 16세였던 666년에 그의 운명과 함께 고구려의 국운이 바뀌는 큰일이 일어났다. 아버지인 연개소문이 죽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남생이 지방순시를 위해 수도를 떠나 있을 때,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이 형인 남생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형제간의 권력쟁탈전에서 패해 수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남생 일파는 이러저러한 논의들을 구구하게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헌성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자 당시 부수도였던 국내성(지금 중국 지린성 지린시)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위상이 약화된 국내성의 귀족들은 아무래도 중앙귀족들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천도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또 거대한 무덤과 우수한 벽화고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권력과 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 세력에 대한 그들의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양원왕 13년(557)년에도 이곳 환도성의 간주리(干朱理)가 모반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헌성은 이 지역의 불만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이곳으로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드라마 '대조영'과 '연개소문'

 

당나라 신하로 변신한 남생 부자의 최후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지방 순시를 하는 동안 동생들인 남건 남산 형제가 쿠테타를 일으켰다. 평양으로 갈수 없게 된 남생 부자는 국내성으로 가려했으나 이조차 여의치 않게 되었다. 예상과 달리 국내성 지역의 귀족들이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남생의 아들 헌성이 또 다른 안을 내놓았다. 당으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군대를 빌어 와 삼촌들을 치자는 것이다. 헌성이 먼저 당으로 들어갔고 다른 사람들도 따라 들어갔다. 마침내 668년 남생 일파는 당나라 군대의 향도가 되어 고국으로 쳐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이후 남생과 헌성은 당의 수도에서 당 황제의 신하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자진 귀화했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므로 당으로부터 고위관직을 받아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남생은 고구려 유민에 대한 지배에도 직접 참여했다. 나당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677년에 당에서는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한 뒤 요동으로 보내 지역민을 안무하게 했다. 고구려유민들의 저항이 워낙 강력하게 지속되어 지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괴뢰국을 세워준 후 보장왕을 통해 유민들을 통치하려 했던 것이다.

 

남생은 보장왕과 다른 경로로 고구려 옛 땅에 파견되었다. 그는 안동도호부의 관리로 파견되어 고구려유민 통치에 참여했다. 고구려유민에 대한 통치와 감시체계를 이중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 달리 요동으로 돌아가자마자 과거 고구려 민이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짜고 고구려 복국(復國)을 도모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고, 보장왕은 다음 해에 귀양지에서 나라 잃은 부끄러운 왕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자진 투항하고 얻은 부귀영화의 씁쓸함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남생 역시 보장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나오지만, 역사서나 그의 묘지명, 그 아들과 손자의 묘지명 등에서는 그런 면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료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럼 그 아들인 헌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에 자진 투항함으로써 그나마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고 당에서 관직활동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개 이민족 정벌을 위한 전쟁터에 계속 동원되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많이 사용하는 수법 중에 하나가 이민족과 전쟁을 치를 때 이민족 출신 장군과 병사들을 선봉에 세우는 것이었다. 이이제이의 하나였다고도 할 수 있고, 한족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천헌성도 당에 대한 충성도와 군사적 능력 면에서 인정을 받아 황제의 최측근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명한 일화도 남겼다. 당을 통치하던 측천무후가 금폐(金幣)를 내리고 군신가운데 활 잘 쏘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천헌성을 지목했다. 그러자 그는 무후에게 "폐하가 활 잘쏘는 사람을 고르라고 했는데 모두 화인(한족)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쏘기 때문에 수치스럽게 여길까 염려되오니 그것을 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굴곡이 심했던 측천무후 집권기, 당의 정치판에서 달리 의지할 바 없는 유민으로서 매우 조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측천무후의 공적을 새긴 거대한 구리기둥인 천추(天樞)를 조성할 때, 검교천추자래사(檢校天樞子來使)가 되어 구리 등 물자 조달을 책임졌지만 래준신(來俊臣)이라는 자의 금품 요구를 거절했다가 앙심을 품은 래준신이 헌성이 모반을 꾀했다고 모함을 해서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나이 마흔 둘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변명만 가득한 연씨 일가의 묘지명

천헌성은 현은(玄隱), 현일(玄逸), 현정(玄靜)이라는 아들 셋을 두었다. 다른 아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장남인 현은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묘지석(무덤주인의 약력이나 극랑왕생을 비는 글을 새겨 무덤안에 넣어둔 정방형의 돌)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인 헌성의 묘지명(묘지석에 새겨진 글)과 22세에 요절한 그의 아들 천비(泉毖)의 묘지명에 이름이 나온다.

남생일가 무덤의 원경. 가운데가 남생묘, 좌측이 천헌성묘, 우측이 천비묘

 

그런데 현은이 손수 지은 아들 천비의 묘지명에는 자기 아들의 출자를 '경조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만 적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한 세대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고, 아버지가 유명인사였으므로 천비가 고구려 출신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은이 아들 비의 출자를 중국의 수도 출신이라고만 밝혀놓고,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고구려에 대한 기억을 잃어서였을까? 나라를 배신한 고구려유민으로서 겪었을 많은 일들과 회한을 잊고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점은 남생과 헌성의 '묘지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둘의 묘지에는 그들이 당으로 갈 때의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오판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대신 그들을 배신한 남건과 남산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놓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내용만 구구절절이 적어놓았다.

 

조국을 배신하고 떠난 이들의 무덤은 북망산에 있다. 최근 이들의 무덤이 확인되어 학계에 알려졌다. 중국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동산(東山) 영두촌(嶺頭村)에 천남생과 그 아들 천헌성, 천헌성의 손자인 천비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사진 참조) 동서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 세 기(基)의 무덤 중 가운데 (전봇대가 서있는 곳) 봉분이 천남생의 무덤이고, 그 좌측에 천헌성, 우측에 천비가 묻혀있다. 남생은 요동에서 이곳까지 유해를 옮겨와 묻은 것이다. 이후 그 증손자까지 함께 묻힌 것을 보면 이 주변이 모두 남생 일가의 가족묘지였던 것 같다.  출처: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타 김현숙(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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