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황금돼지해의 입춘이 2월4일이다.

황금돼지해의 입춘이 24일이다.


통상 새해는 입춘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여긴다. 음력 1, 양력 24일경이며, 태양의 황경이 315°에 와 있을 때이다. 봄으로 접어드는 절후로 음력으로는 섣달에 들기도 하고 정월에 들기도 하며,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들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재봉춘(再逢春)이라 한다. 정월은 새해에 첫 번째 드는 달이고, 입춘은 대체로 정월에 첫 번째로 드는 절기이다. 입춘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기로서, 이날 여러가지 민속적인 행사가 행해진다.



그 중 하나가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는 일이다. 이것을 춘축(春祝입춘축(立春祝)이라고도 하며, 각 가정에서 대문기둥이나 대들보·천장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옛날 대궐에서는 설날에 내전 기둥과 난간에다 문신들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서 좋은 것을 뽑아 써 붙였는데, 이것을 춘첩자(春帖子)라고 불렀다.

사대부집에서는 흔히 입춘첩을 새로 지어 붙이거나 옛날 사람들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쓴다. 제주도에서는 입춘일에 큰굿을 하는데, ‘입춘굿이라고 한다. 입춘굿은 무당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수심방首神房 : 큰무당이 맡아서 하며, 많은 사람들이 굿을 구경하였다.

이 때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걸립(乞粒)을 하고, 상주(上主옥황상제·토신·오방신(五方神)을 제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입춘일은 농사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첫번째 절기이기 때문에 보리뿌리를 뽑아보고 농사의 흉풍을 가려보는 농사점을 행한다. ,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한다. 사주명리학에서 중시하는 만세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황금돼지해인 己亥년 설(음력 11)은 입춘보다 하루 뒤인 25일이다. 입춘이 됐으니 새해가 벌써 시작된 것이지만, 사람이 계산하는 날자로는 하루 늦게 새해가 시작되는 셈이다. 이걸 두고 옛날에는(특히 설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던 일제시대에는) 음력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이라고, 근거도 없는 악선전을 해댔다. 하지만 이는 둥그런 원의 한 바퀴는 360°이고, 해가 한 바퀴 도는 공전주기는 365일과 1/4이며 달의 공전주기는 354(348+6)인 사실을 갖고 달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시차조정일 뿐 전혀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설을 못 쇠게 총칼 들이댔던 일제.. 총의 (總意)로 이겨낸 우리 민족

 

좀 복잡하지만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1년은 12달이 있고 한 달은 30일인데 3601년의 상수다. 해는 하늘과 만남에 5일과 940분의 230일 많은 것은 기영(氣盈)이 되고 그만큼 모자라는 것은 삭허(朔虛)가 된다. 기영과 삭허가 합해 윤달이 생기는데, 1년에 10일과 940분의 827일 된다. 그래서 3년에 한 번 윤달은 32일과 940분의 601일이고, 5년에 두 번 윤달은 54일과 940분의 375일고, 19년에 7번 윤달은 206일과 940분의 673일로, 기영과 삭허가 나뉨 없이 나란해진다. 따라서 19년에 7번 윤달 두는 章法이 동양 고대부터 쓰여 온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입춘 우수로 시작해 소한 대한으로 끝나는 24절기를 음력에 따른 것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24절기는 태양의 이동에 따른 해의 위치에 맞게 만든 것이어서 태양력 현상이다. 다만 구체적인 계절의 느낌, 1년 가운데 가장 춥다는 소한도 해마다 약간씩 다른 것은 달의 위치변화에 따라 조정된 따른 것으로 받아들이면 꼭 정확한 것은 아니라도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달의 크기와 위치에 따른 조수간만의 차이라든가, 농사의 때를 아는 것도 태양력보다는 태음력이 훨씬 유용하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태양태음력은 하늘과 땅의 운행질서와 사람이 느끼는 계절 변화를 가장 조화롭게 만든 달력(冊曆)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는 1894년 갑오왜란을 일으켜 滅洋斥倭(외세를 몰아내고 왜적을 배척한다)는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군을 무참하게 도륙한 뒤 양력 시행을 강제했다. 5000년 가까이 자연스럽게 써오던 태양태음력을 하루아침에 없애고, 전혀 우리 체질에 맞지 않는 태양력만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백성들은 이 때 함께 시행한 단발령에 대해 머리 깎는 것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일본 놈들이 강제로 깎으라고 하는 것에는 따를 수 없다며 반대했듯, 농사철 조수간만 등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 태양력도 쓰지 않았다.

특히 일제는 강점기 때 우리 고유의 설을 쇠지 못하도록 했다. 오로지 양력 11일만을 新正이라고 해서 설로 쇠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51년 동안의 장기항일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고, 끝내 설도 지켰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 때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설을 없애고 신정만 쇠라고 했지만, 이도 결국 민심이 어디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정책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설 못지않게 큰 명절은 정월대보름과 한가위 보름달

한 해가 시작되는 설날에는 온 가족이 모여 떡국을 먹고 조상께 차례를 지낸 뒤 어른들께 세배 드린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동네 안은 물론 인근 동네에게까지 건너가 세배 드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세배가 끝나면 윷판을 벌려 단군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윷판에서 삶의 지혜를 깨달았다. 윷판은 가운데 북극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7개 별자리를 놓이게 해 28수를 배치하고, 도 개 걸 윷 모의 다섯 동물들이 협동해서 다른 팀을 어떻게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혜가르침이다. 윷놀이가 끝나면 흥겨운 지신밟기가 이어지고, 지신밟기가 끝나면 밖으로 나가 연날리기를 하고 액운을 연에 날려 보내는 행사를 한다.

설은 대개 정월대보름 명절로 이어졌다. 1년 중 첫 보름달이 떠오르는 정월대보름. 이날은 본격적 농사철이 시작되는 것을 앞두고 논둑에 불을 놓아 기생하는 병충들을 태워 죽이는 쥐불놀이를 하고, 한 달 쯤 지나면 본격화되는 농사철에 대비해 큰 잔치를 벌임으로써 힘을 비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

달과 보름달에 대한 동양과 서양, 아니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감정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 농경문화에서의 보름달은 이태백이 술 마시고 놀고, 한가위 달집 태우며 환호하며, 초승달보고 떠나간 님 애틋하게 그리는 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 마디로 우리의 벗, 초승달 보름달이다.

하지만 유목문화에서는 다르다. , 특히 밤을 환하게 밝히는 보름달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늑대가 나타나 힘들여 키운 양의 목을 물고 피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남기고 멀어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포의 광경은 드라큐라 전설을 많이 낳았다. 농경문화에 드랴큐라 전설이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는 현대 호텔문화에 교묘하게 혼합돼 있다. 호텔에 가면 침대를 감싸고 있는 것은 하얀 홑이불(Bed Sheet)이다. 이것은 유목문화인들이 농경문화인들이 누리고 있는 하얗고 따듯한 솜이불을 동경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호텔방에는 그냥 바깥에서 신고 다니던 신발, 구두를 그냥 신은 채로 들어간다. 신을 침실까지 신고 들어가는 것은 농경문화에서는 경을 칠 노릇이다. 이는 유목문화의 유산이다.

 

저녁이 있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은 농경문화에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밥 짓고 가축 먹이 주고 함께 먹으면서 그날 하루에 감사하며 다음날을 준비한다. 전기불이 없었던 시절이라 해가 완전히 넘어가면 곧 사람들도 잠자리에 들어 농사일로 피곤해진 몸을 잠으로 달랜다.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몸부터 일어나 아침을 짓고 농사채비를 갖춘다.

하지만 유목문화에서 저녁은 새로운 전쟁의 시간이었다. 해가 환하게 떠 있는 동안은 늑대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으나, 캄캄한 밤에는 늑대가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다.

요즘은 농경문화 유목문화가 뒤섞여 살아가기 때문에 두 문화를 구분 짓기가 불가능하고 구분 짓는 게 의미도 없다. 다만 문화원류가 무엇인가를 가끔 생각해보면 자문화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인류에게 보편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지평을 넓일 수 있다. 세계에서 통할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내 것도 잘 알고 다른 나라 것도 매우 잘 알아야 한다. 내 것과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니 존중할 수 있는 게 관용이고 그것이 창조의 토대다.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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