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DMZ 평화 전망대

철의 삼각지를 탐방하는 안보관광지 철원

철의 삼각지 평화전망대

무려 12번이나 백마고지의 주인은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30만발 가까운 포탄을 쏘아댔다.  6ㆍ25 전쟁 영웅인 고 백선엽 장군은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이 하얗게 드러났는데, 멀리서 보면 백마 한 마리가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일대를 내려다보는 곳이다. 여기를 북괴군에게 뺏기면 철원 일대를 통과하는 유엔군 보급선을 위협할 수 있었다. 중공군이 3개 사단을 동원해 백마고지를 차지하려던 배경이었다. 육군 9사단은 백마고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중공군을 물리쳤다. 9사단은 이를 기념해 백마부대라고 불리게 된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국군은 3,396명 전사하고, 중공군은 1만4천여명이 죽었다.

철의 삼각지는 6·25전쟁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인 1951년 5월부터는 전선이 중부 전선에 고착되고 고지전에 집중되면서 전사자만 늘어나는 소모적인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휴전회담은 지지부진하고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투가 이곳 철원, 평강, 김화를 잇는 삼각 축선을 기준으로 반복되었다. 북으로 갈수록 고지가 높아져 아군은 공격하기가 힘들어 미 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이러한 특수한 지형을 철의삼각지 Iron Triangle라고 이름 붙였다. 철의 삼각지 일대에 벌어진 공방전과 고지전을 철의 삼각지대 전투라고 하는데 파일드라이버(Pile Driver) 작전과 바로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걸 볼 수 있는 곳이 철원 평화전망대다. 6·25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저기 보이는 백마고지, 특히 철원평야를 잃고 피눈물을 3일간 흘렸다는 피의 김일성 고지, 500 능선, 오성산, 저격능선, 낙타 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등의 전적지가 이곳 철원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중부 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 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설계되어 제2땅굴과 군 막사, 검문소를 재현한 전시물과 비무장지대 사진 등이 갖춰져 있으며, 2층에 설치된 전망대에는 초정밀 망원경으로 휴전선 일원 비무장지대와 북괴의 평강고원, 북괴 선전마을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또한 북쪽의 지리적 특성을 볼 수 있는 지형 축소판이 있어 민족분단의 현실을 잘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철원은 천 년 전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읍이었다. 그 흔적들이 저 밑에 내려다보이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어 직접 볼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다행스러운 것은 유적들이 고스란히 저 안에 묻혀있어,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지만, 지뢰들이 저 문화재를 지키고 있는 현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지니 안타까움만 사무친다. 옥외전시실에 태봉국 철원성의 모형도가 있어 궁예의 태봉국 수도를 살펴볼 수 있다.

철원은 6·25전쟁 이전엔 북괴에 속했다가 전쟁 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구이다. 전쟁 중에는 남북 간에 화력이 집중됐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중무장하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안보의 최일선이다. 또한 수십 만발의 집중포화에도 용케 살아남은 철원노동당사는 당시 38선 이북에 있어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동시에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어 철원은 공산 정권 아래에 들어갔다. 경원선의 중심역인 철원역의 소재지였고 분단 직후 일시적이나마 북강원도 도청 소재지였을 정도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도 공산 정부는 인근 지역인 포천, 연천, 이동, 일동, 김화, 평강 일대를 아우르는 노동당사 철원군지부를 철원군 철원읍 시가지 한복판에 건립하였다. 철원 노동당사는 북한이 공산 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사용한 핵심 기관이었다. 2002년 5월 31일 국가 등록문화재 제22호로 등록되는 등 일부 건축물과 북한의 남침 야욕을 보여주는 제2땅굴, 월정리 역 등을 통해 안보 관광이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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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