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가 직접 필사하여 손에 들고 다니던 관음경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독립시켜 관음경이라고 한다. 추사는 닥지(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에 직접 필사하여 종이를 덧대고 두루마리 형식으로 접어 손에 휴대하기 좋게 만든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직접 필사하여 손에 들고 다니던 관음경

추사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할 때 아내를 잃었다. 아내의 죽음 소식도 바다를 건너오느라 한 달 뒤

에나 들었다. 추사는 그 애통함을 "내세에는 우리 부부 운명을 맞바꿔 나는 죽고 당신은 천리 밖에 살아남아 나의 이 슬픔을 맛보게 하리라"는 표현으로 토로했다. 추사가 제주도 귀양 시절인 1840년대에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관음경(觀音經)을 추사는 수진본(袖珍本)으로 재단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독립시켜 관음경이라고 한다. 추사는 닥지(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에 직접 필사하여 종이를 덧대고 두루마리 형식으로 접어 손에 휴대하기 좋게 만든 것이다.


                                                            추사가 필사한 관음경


                                                                              추사의 제주 유배지 


관음경은 선남선녀들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모두 해탈을 얻어 불에 들어가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물에 빠져도 능히 빠트리지 못하는 등 모든 고통과 장해가 없어진다는 경전이다. 추사가 이 경문을 쓰면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사뭇 짐작된다.

이 관음경에서 추사체의 초기 모습이 발견된다. 추사만의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는 주로 제주도 귀양 시절에 완성되었는데, 마치 불교의 돈오(頓悟)처럼 나타나 원통무애(圓通無碍)한 정신을 보여 준다. 삶에 대한 회한과 귀양살이의 고통이 어느 순간 내면에서 승화해 글씨에 스며든 결정체 인 것이다. 다산과 불교 승려들과의 교류는 널리 알려진 바인데, 다산과 그의 아들 유산 정학연이 쓴 글씨를 한 데 묶은 '다산유산양세묵보(茶山酉山兩世墨寶)'라는 서첩이 있다. 다산이 강진 유배 중이던 1815년 자굉이라는 승려에게 준 것으로, 다산이 불교에 대한 소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그 안에 이런 문구가 있다.

'지혜(慧)란 우둔함(鈍)의 뿌리이고, 공교함(巧)은 졸렬함(拙)의 뿌리다. 신수(神秀·중국 당나라 때 선승)가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부엌에서 일하던 혜능이 먼저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지 않았는가. 우둔함과 졸렬함이야말로 도를 이루는 근본이다.'  다산이나 추사같은 당대의 지성인들이 그러했음을 보면 종교란 역시 대단한 것이다. 추사는 아내와 염주는 남에게 빌려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말하였으며, 중국에서 구해온 염주와 손수 필사한 관음경은 추사의 품에서 평생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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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