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7

속리산 말티재(말티고개)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7

속리산 말티재(말티고개)

말티고개라고도 불리는 말티재는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속리산의 언덕으로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 산5-12번지다.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을 오르기 위해 길을 닦았다 하며, 그 뒤 인도의 형태로 존재하였지만, 현재의 말티고개길과 속리산 등산로는 당시 일제강점기인 1924년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이 속리산의 사찰들을 방문하기 위해 속리산을 방문했는데 진흙탕으로 된 길을 보고 분개하여 당시 보은군수 등을 종용하여 말티고개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1924년 포장하게 하였다. 이때 최초로 자동차와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길이 개통되었다. 그 뒤 1967년 도로 폭을 15m 정도 확장 시켰으며 1980년대에는 인도를 깔기도 했다.

속리산의 관문인 말티재는 열두 개의 언덕과 열두 개의 굽은 언덕이 숲과 조화를 이루는 가파른 언덕으로 '말티고개'라고도 불린다. 말티고개라는 이름은 조선 제7대 왕이었던 세조가 고개 아래 장재리 대궐터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타고 온 가마 대신 말로 바꾸어타고 고개를 올랐다는 역사적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이 아름다운 열두 구비의 꼬부랑길은, 예전엔 임금조차 가마에서 내려서 말을 타고 넘어야 할 거친 길이었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말'의 기원은 '마루'로 '높은 언덕'을 의미한다고 한다. 말티재 초입에 세조가 머물렀던 행궁터가 있다.


장재리 대궐터, 지금은 행궁터로 바뀌었다.

말티재 입구

백두대간 속리산관문

말티재표지석과 말티재 전망대

말티재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굽이 길 초록빛 가드레일이 선명하다.


말티재는 백두대간이 속리산으로 연결되는 한남금북정맥이 쉬어간다는 보은 읍내에서 약7km 지점의 속리산 입구에 있는 언덕으로 높이는 해발 430m이다. 신라 진흥왕 14년인 553년, 인도에 다녀온 의신조사가 법주사를 세우기 위해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이 고개를 넘었으며, 이후 수많은 이들이 이 고갯길을 거쳐 법주사로 향했다. 그래서 말티재는 속리산의 관문이라 불린다. 180도로 꺾어지는 S자 굽잇길을 여러 차례 돌고 돌아야 오를 수 있다. S자로 돌 때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여주는 초록빛 가드레일이 선명하다.


속리산에는 오랫동안 존재한 薄石(박석) 길이 유명하였는데 이 박석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불경을 탐독하다가 생을 마감한 조부 작제건을 찾아가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때 박석(얇은돌)을 운반하여 3~4리의 고갯길을 깔은 것이 시초라 한다. 중종 26년인 153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보은현의 동쪽 6㎞에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 행차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서 길을 닦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래서 말티재는 박석재라고도 불린다.

보은군의 전승에 의하면 그 뒤 조선 시대에 세조가 속리산을 오를 때에도 진흙으로 된 길이라서 행차를 위해 얇은 박석을 운반하여 길을 정비하였다 한다. 세조가 한양에서 청주를 거쳐 속리산으로 향하면서 말티재를 넘었다.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뒤 몸과 마음의 병을 앓았던 세조가 속리산을 찾은 것은 피부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만나 심신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기여한 신미대사는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부터 스승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는 법주사에 '금동미륵대불'을 세우려고 이 고개를 넘었고, 고려 공민왕은 국운 상승을 기원하려고,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 100일 기도를 하려고, 임진왜란 때 승병들은 이 고개를 넘어 법주사에 집결했고, 사명대사는 불에 탄 법주사를 재건하려고 이 고개를 넘었다. 구한말 당백전에 쓰기 위해 금동미륵대불을 훼철하러 가던 사람들도 모두 이 말티재를 넘어갔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당시 충북지사 박중양이 신작로를 냈다.

백두대간 속리산 관문은 단절된 말티재 생태 축을 복원하기 위해 2017년에 세웠다. 93년 만이다. 이제는 말티재를 넘지 않고도 터널이라는 지름길로 편하게 속리산으로 갈 수 있게 됐으며, 사람들의 걸음이 뜸했던 말티재는 전망대를 세우면서 일부러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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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