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

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 위치하는데 삼국이 쟁패한 국경의 요충지로 축성시기와 축성기간, 동원된 인력, 성곽전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알려진 유일한 고대산성이다.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1973년 5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보은군 자료에 의하면 삼년산성은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 보은읍(報恩邑) 어암리(漁巖里) 오정산(烏頂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축산성. 둘레 1680m.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문터[門址(문지)] 4개소, 옹성(甕城)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水口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고 전한다.

이 성은 자비왕 13년(470)에 축조되었으며, 486년(소지왕 8)에 개축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삼년군(三年郡)·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자 항(項)이 정(頂)과 헷갈려 오기된 듯하다. 이 산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자(井字)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 쌓기, 한 켜는 세로 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1983년 발굴 결과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의 이용 편년(編年)을 입증해 주고 있다.


김생의 글씨로 추정되는 바위의 글씨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7개소의 옹성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하였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있으며, 유명한 아미지(蛾眉池)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곳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주변의 암벽에는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 등의 글씨가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로 전한다. 신라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조선시대까지 줄곧 이용되었음을 증명해준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삼년산성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이 당대 최고 수준이다.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는데 작은 돌도 전혀 틈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우진 성벽은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또한 성벽 바깥쪽은 깊은 계곡으로 되어 있어 성벽을 기어오르기 힘들도록 만들어졌다. 5세기 후반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대고 영토 전쟁을 벌일 때에도 이곳 보은 일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백제에게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신라는 보은을 지키기 위하여 삼년산성을 쌓았던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에 뛰어든 것도 삼년산성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곳 삼년산성이 난공불략의 요새로 여겨지는 것은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있는 산성이었으며, 삼국의 모든 전투가 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을 확보한 나라가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 따라서 삼국은 성을 쌓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였으며 별다른 장비와 운반이 용이하지 않은 시대에 신라인들의 고민과 노고가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년산성의 축성법이나 위치 그리고 구조를 볼 때 당시로는 대단한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년산성에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옥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왕의 죽음이다. 삼년산성을 세운지 100여년 뒤의 일인데 이 사건으로 신라의 통일 전쟁이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즉 삼년산성의 장수인 고간 도도가 백제 성왕을 죽인 사건이다. 신라와 백제의 동맹 관계가 무너진 6세기 중엽,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해 백제 성왕은 554년 대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쳐들어왔다. 이때에 삼년산성에 진을 치고 있던 신라의 장군 고간 도도는 성을 빠져나와 백제군을 기습하여 구천(지금의 옥천)에서 성왕을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을 잃었다고 한다. 결국 성왕의 죽음과 대군을 잃은 백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신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을 것이다.

삼년산성은 뒤에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천정(지금의 이천)을 떠나 탄현으로 진격할 때 대군이 주둔하였고, 고구려를 공략할 때에도 중요한 전초 기지였을 것으로 추축된다. 백제의 왕을 역사상 이름이 들어나지 않는 한 장수가 죽였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삼년산성의 역할과 산성을 지키는 장수의 수준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약 백제의 성왕이 대군을 이끌고 삼년산성을 함락시켰다면 역사는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이다. 신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백제는 한강을 회복하고 나아가 고구려를 향하여 북진하는 형국이 되었을 것이다.

신라에 의한 통일로 한민족의 영토가 축소되는 비극은 어쩌면 삼년산성의 완벽한 지리적 조건과 수성에 알맞게 축성된 형태에서 기인하였는지 모른다. 공주에서 사비 부여로 천도하여 국운을 일으키려던 성왕의 큰 꿈은 신라인들이 구축한 삼년산성으로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신라는 삼년산성의 축조로 두 가지 목표를 이루는데 그 하나는 산성 축조 후 200년이 되었을 때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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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