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부인사

부인이란 선덕여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신라시대의 왕비를 부인이라 칭한 것에서 연유한다. 이를 통해 보면 부인사가 선덕여왕의 원당(願堂)이었던 것으로 본다.

팔공산 부인사

부인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선덕여왕 때인 7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에서는 오래전부터 선덕묘(善德廟)라는 사당이 있었다. 또한 이 마을에는 3월 보름마다 선덕제를 지내고 있었다. 요즘은 선덕여왕 숭모회의 주관으로 선덕여왕 숭복대제를 지낸다.



부인사의 한자표기는 고려사에는 符仁寺로 쓰여 오다가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 대구부읍지 등에는 夫人寺로 바뀌어 표기되고 있다. 부인이란 선덕여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신라시대의 왕비를 부인이라 칭한 것에서 연유한다. 이를 통해 보면 부인사가 선덕여왕의 원당(願堂)이었던 것으로 본다.

부인사가 전성기에는 39개의 부속 암자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만의 승시장(僧市場)이 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오늘날 동화사에서 해마다 승시를 여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고려시대의 부인사는 2천명의 승려가 수도했다. 고려 현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시기에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감을 설치하여 6천여권의 초조대장경을 판각하였다.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대장경은 1232년(고종19년) 몽고의 2차 침입 때 대부분 불에 타 없어지고 일본 교토 남례사에 1715판만 전하고 있다. 속설에는 당시에 부인사에 딸려있던 농민들이 의도적으로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1203년(신종6년)에는 부인사의 승려들이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반무신란을 일으켰다. 무신정권의 수립으로 왕실과 귀족의 비호 아래 발전해 오던 불교가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승려들이 지방의 농민과 노예 등의 반란에 편승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부인사 승려들의 난은 당시 좌도사 최광의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승려들을 붙잡아 섬으로 귀양을 보냄으로서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해서 부인사는 반무신란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부인사 경내에는 주변에 넘어져 있던 탑을 1964년 팔공산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신라오악조사단이 수습하여 복원을 한 것이다. 서탑은 제법 복원이 되어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동탑은 유실된 부분이 많아서 새 부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새롭게 보충한 석재가 황등석으로 되어서 이질감을 많이 느낀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은 당연히 고향의 돌인 황등석으로 복원하는 것은 맞다. 반드시 그 지역의 원자재를 쓰라는 법은 없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이동도 용이하고 지역의 정서에 맞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인사의 석재 역시 팔공산 돌을 선택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서탑은 2층 기단으로 하층기단은 4개의 돌로 맞추어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하고 갑석도 역시 4개의 돌로 그 상면에 상층기단을 받치는 2단의 괴임을 만들었다. 상층기단은 4개의 면석에 2개의 판석을 얹었는데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다. 갑석에는 아래에 부연을 조각하고 위에는 2단의 괴임이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탑신석을 각각 1개의 돌로 하였다. 탑신에는 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에는 5단의 받침이 있다. 옥개석 상부는 1단의 괴임이 있다. 상륜부는 방형의 노반이 있고 여기에 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쌍탑과 더불어 훌륭한 석등이 일품이다. 서탑과 함께 1964년에 복원이 되었다. 이 석등은 지대석과 간주석 그리고 화사석의 비례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석등이다. 기단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의 돌에 지대석과 하대석을 함께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대석 위에 다시 두 겹으로 된 연꽃무늬를 하고있다. 하대석의 4면에는 각각 2개씩 안상을 새겼다. 간주석 위에 있는 상대석에 두 겹의 연꽃무늬가 하대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화사석의 4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만들었다. 옥개석은 일반적인 팔각원당형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3단의 층급받침을 조각하고 상부에는 8개의 우동이 있다. 옥개석 윗부분에도 연꽃을 조각해서 상륜부를 받치도록 되었다. 그 이상은 유실되고 없지만 하대와 상대 그리고 옥개에 있는 연꽃이 이 석등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는 또 다른 석등이 있다. 암지석등(庵址石燈)이라고 하는데 한때 도난당했다 돌아온 것이다. 지대석과 하대석 그리고 간주석은 일반형 석등과 비슷하지만, 이 석등의 특징은 평면으로 보았을때 장방형으로 생겼다. 화사석이 평면 장방형으로 화창이 두 면에는 쌍으로 나머지 두 면에는 1개씩 만들었다. 그러니까 두 개의 화사석을 이은 형태이다. 옥개석은 경사가 심하고 우동이 있지만 기와골은 없다. 여기에도 옥개 윗부분에 연꽃을 돌렸다.



절터의 앞 공간에는 여러가지 석재를 수습해 놓고 그 가운데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부인사 서쪽 계곡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도굴꾼에 의해 도난당했다 다시 찾았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방형으로 그 위에 연화문을 돌리고 네 모서리에 사자를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동물상, 동자상, 꽃무늬를 새겼다. 상대석도 팔각으로 앙련을 돌렸다. 탑신석은 팔각이나 아래 위로 굵기를 줄여 배훌림 기둥처럼 보인다. 그 정면에 은통당(隱通堂)이라는 글씨가 연꽃 위에 음각되었다. 옥개석 위에는 우동이 높게 되어 있고 그사이에 기와골을 조각하였다. 끝에는 귀면을 새겼다.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팔각원당형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난 독특한 양식이다. 기단부와 탑신부도 비례가 어울리지 않고 표현기법도 많이 약식화 되어 있다. 은통당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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