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북지장사

절로 가는 길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너무 잘 어울린다. 얼마 만에 이런 길을 걸었을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닌데 그때의 풍경에 목말라 있었다.

팔공산 북지장사를 오르며

팔공산은 지금 울긋불긋한 단풍에 물들어 춤을 덩실덩실 추는 것 같다. 북지장사는 큰 도로에서부터 걸음이 시작되지만 비포장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왠 만하면 포장하고 야자 매트 깔고 했을 텐데 여기는 아직까진 옛날 그대로이다.



그런 점이 무척 다행스럽고 또 고맙다. 절로 가는 길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너무 잘 어울린다. 얼마 만에 이런 길을 걸었을까. 먼 옛날이야기도 아닌데 그때의 풍경에 목말라 있었다. 뽀얀 흙먼지 날리던 포플러 가로수길에서 꿈과 낭만을 키웠다.

그런 추억 속의 길이 급격한 경제성장에 힘입어서 죄다 덮어버려 숨 쉴 여유조차도 없어졌다. 물론 경제발전도 중요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시설은 싸 그리 정리한다고 묻어버리고 일부 남은 적산가옥 몇 채 쓸고 닦고 해서 관광상품으로 내놓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걸 또 신기하고 좋다고 연신 인증사진 찍어서 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먼저 우리의 시골 풍경을 만들어 보자. 민속촌이 아닌 우리가 먹고 자고 했던 마음의 고향을 찾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황톳길에 뿌려 놓은 단풍을 즈려밟고 은행잎이 비처럼 내리고 이 얼마나 낭만적인 길인지 모른다. 길가에는 도토리 주워 모아 입속에 넣어 양 볼이 볼록한 다람쥐를 만날 수 있고 마른 이끼 돌 틈에는 귀뚜라미가 암컷을 부르는 세레나데가 들린다. 청산은 말없이 살라고 했는데 이미 말문을 닫고 멧새와 울새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가다 보면 힘이 드는 줄도 모른다. 세속의 삶이 늘 이와 같다면 굳이 불이문을 찾을 필요도 없을듯 하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면 고운 단풍 사이로 절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바세계는 지금 단풍으로 불타고 있는데 사왕천에는 유리같이 맑고 푸른 창공이 마중을 나온 것만 같다.



오늘따라 북지장사의 지장보살이 더 환해 보인다. 여기서부터 서른 세계단만 오르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데 왜 그곳까지는 아무나 갈 수가 없는 것일까. 아니, 무수히 많은 부처가 이미 삼천대천 세계에 머물러 있는데 오히려 거기까지 올라가지 못한 중생들이 부처보다 더 많다는 계산이 나온다. 훨훨 벗어버리고 올라가는 길을 알면서도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인연과 번뇌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아득하게 먼 곳이고 가까이 있다고 느끼면 바로 앞이 거기인데 자하문의 문턱도 만져 보지도 못하고 다른 길목에서 서성거리며 우매함의 극치를 달린다.

단풍은 떨어지기 전에 고운 옷을 갈아입고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기 전에 하늘에 물을 들이는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고 다음으로 가야 하는 밑그림일 뿐이다. 멋지게 끝을 내는 것이 아니고 다음을 더아름답게 약속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시들어 쓰러질 때까지는 멋진 꽃을 피울 수 있다. 젊었을 때 피웠던 원색 꽃이 아니라 낙엽처럼 노을빛처럼 은근하고 우아하고 노련하게 물들일 수 있다.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한 폭의 작품이 이미 시작을 한 것이다. 문명이 워낙 발달하여 이 지구를 떠나서 다른 행성을 찾는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넘어가고 찾아가야 하는 곳은 공간이 아니고 시간을 초월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외계인과 닿지 않는 이유도 바로 시간을 뛰어넘는 기술이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산길을 오르며 잡념을 쏟아 놓았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빗장을 열고 들어 가보자.


대구의 남쪽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남지장사가 있고 그 대칭으로 팔공산에는 북지장사가 자리 잡았다. 684년에 창건된 남지장사는 임진왜란 때 3000여 명의 승려가 있던 큰 사찰이었다. 북지장사도 한때는 동화사를 말사로 거느리는 때도 있었다. 지금은 동화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신라 소지왕 7년(485년) 극달화상이 창건하였고 고려 중기 명종22년 (1192)에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지장전 처마 밑에 있는 비석 "지장사유공인영세불망비"에 신라 시대 고찰이라고 적혀 있다. 정종6년(1040)에 고려시대의 문인 최제안이 쓴 경주 천룡사의 중창과 관련된 신서(信書)를 보면 북지장사의 납입전이 200결이라고 기록하였다. 보조국사가 중창한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지장전 기와에서 천계 3년(1623), 강희 4년(1665) 등의 명문이 나왔다.




이 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이 지장전이다. 2011년 해체보수 결과 영조 37년(1761) 지장전으로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구조로 단층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정면에 사각기둥을 2개 넣어 3칸 형식으로 한 것이 특이하다. 다포양식으로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수법을 따르고 있다. 공포 위에 설치한 용머리 조각 등은 조선후기의 수법이다. 건물의 평수에 비해 지붕을 겹처마로 처리해 큼직하게 구성하였다. 작은 집을 크게 보이려고 하는 것인데 처마가 깊어짐에 따라 사방의 추녀 끝에 활주를 세워서 받치고 있다. 지붕의 가구 형식은 특이하게 정자에서 쓰는 건축기법을 사용하였다. 정면에는 꽃살 창호로 옆으로는 띠살 창호를 달았다. 기단은 2단으로 쌓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지장전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화강암으로 전각 뒤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인데 약 50년전 폭우로 인하여 발견된 것이다. 대좌와 광배는 없는 상태이다. 전형적인 지장보살의 모습으로 민머리에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촉지인을 하고 있다. 단정한 모습에서 동자승과 같은 친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통견으로 된 법의는 조각선이 가늘고 약하며 형식화된 것을 통해 보면 불상의 조성연대가 많이 내려 감을 알 수 있다. 1725년에 제작된 지장보살도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경내에 있는 탑은 요사채 동쪽의 밭에 있던 것으로 도굴꾼에 의해 무너져 있던 것을 1981년 현 상태로 복원을 한 것이다. 동서 쌍탑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지장사가 신라 시대에 유행했던 쌍탑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리고 상륜은 유실되어 새로 복원하였다.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탑은 하층 기단에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갑석에는 괴임대를 마련하였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양쪽에 우주와 가운데 탱주가 있고 갑석은 아래에 부연이 있고 그 위에 괴임을 만들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탑신석이 각기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각 층의 탑신에는 우주가 있다. 상층으로 갈수록 크기가 급격히 체감되고 있다.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위에는 괴임이 2단으로 되어 있다. 낙수면의 경사가 심하여 경쾌한 느낌으로 보이며 끝부분에 반전이 매우 탄력적이다.



북지장사 가는 길   -   정태상 作


돌 위에 피어난 꽃 한송이 못 보았소
저 길목 돌아가는 이슥한 산모퉁이
번뇌의 쓰레기 조각 불꽃으로 피우리

지팡이 잡은 모습 어설픈 흉내 내고
그림자 사라진 곳 허공을 헤매다가
서리에 소스라치며 투명하게 걸으리

발자국 따라오다 골짜기 들어서서
불나방 달려들 듯 낙엽이 달라붙어
집착을하지 않으면 어디라도 좋으리

누더기 벗어 놓은 길 위의 비늘 조각
갈증도 탐욕이라 미련도 도려내고
얼룩진 불길 속으로 물거품을 태우리 



고대의 석탑 및 가람배치 연구에 많은 자료가 되는 만큼 잘 보존해야 한다. 오늘도 새로운 당우를 세운다고 목수들의 망치 소리가 요란하다. 그 전에 충분한 지표조사를 하고 멀리 내다 보았으면 한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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