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봉총

"천 년 찬란한 신라의 무덤을 모독할 수 없다. 왕관에 봉황새 문양이 있으니 봉황대로 하면 어떨까" 하며 사양하였다. 일본 관리들은 머쓱해서 "그럼 서전의 '서'자와 봉황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으로 하겠습니다"해서 지금의 이름이 된 것이다.

경주 서봉총
(경주 대릉원 일원 노서동 고분군(사적512호)​

일제 강점기인 1925년 경주역에서 기관차고를 짓는데 매립할 흙이 모자라자 일제는 신라 고분의 봉분 흙과 자갈을 공사장에 보내고, 유물은 유물대로 파보자는 심사로 이 고분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발굴 책임자는 조선 총독부 촉탁이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고 1926년 10월 드디어 목곽이 발견되었다.

이때 일본에는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6세 황태자(1882~1973년)가 신혼여행차 황태자비 루이즈 마운트배틀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일본은 구스타프가 고고학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고 구스타프에게 신라 고분 발굴에 참가하기를 간청하였다. 구스타프는 흔쾌히 수락하고 10월 9일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였다.

10월 10일 새벽, 경주 토함산 일출과 불국사를 구경하고 경주박물관에서는 성덕대왕신종의 웅장하고 장중한 종소리를 감상하였다. 그는 10시에 노서리 발굴 현장에 도착, 발굴 작업을 지켜보고 금관을 덮고 있던 흙을 직접 걷어내었다. 그러자 찬란한 1500년 전의 금관이 나타났던 것이다. 금관총, 금령총에 이어 신라 고분에서는 세번째로 금관이 출토되었다.

그날 저녁 구스타프가 경주 최부자댁의 고풍스런 99칸 저택에서 머물며 순 한국식 진수성찬을 대접받은 자리에서, 일본 관리들은 이 고분의 명칭을 스웨덴을 지칭하는 서전총(瑞典塚)이라고 명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정색을 하면서 "천 년 찬란한 신라의 무덤을 모독할 수 없다. 왕관에 봉황새 문양이 있으니 봉황대로 하면 어떨까" 하며 사양하였다. 일본 관리들은 머쓱해서 "그럼 서전의 '서'자와 봉황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으로 하겠습니다"해서 지금의 이름이 된 것이다.

서봉총 조사를 맡았던 고이즈미는 1933년 평양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35년 '고적 애호일'을 지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 중인 서봉총 출토품을 대여하여 전시를 하였다. 전시 종료 후 이를 기생집에 가져가 금관을 비롯한 유물을 기생에게 착용시키고 술자리를 열었다.

서봉총은 남분과 북분이 있는데 이중 구스타프 황태자는 북분 발굴에만 참가하였다.
남분은 막대한 발굴비용 부담으로 발굴이 지연되고 있었는데, 3년이 지난 1929년 영국 귀족 퍼시벌 데이비드경에게 자금을 지원받아서 남분을 발굴하였다. 데이비드 집안은 할아버지대에 영국에서 영국령 인도로 건너가 정착해 면사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집안이었다. 데이비드가 사업차 중국에 가 있을 때 서봉총 이야기를 듣고는 "조선의 고대 문화유산이 발굴되면 좋겠다. 내 희망을 허락해 준다면 발굴시 견학하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3천엔을 보냈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발굴은 시작했는데 출토 유물로는 금제 귀걸이 2개, 팔찌 4개, 반지 5개, 황색 및 흑색 유리구슬 등이었다. 그래서 데이비드의 공로를 보아서 남분은 데이비드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정태상ⓒ


경주 노서동고분군, 서봉총(瑞鳳塚)


1926년 서봉총 발굴 현장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서봉총 금관 발굴당시

서봉총 금관 보물 제3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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