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지명의 유래10 – 청주 천석골

부자 서천석이 살던 청주 천석골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지명의 유래10 – 청주 천석골

우리나라 곳곳에는 다양한 이름의 마을들이 있다. 그 마을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서로 다른 도시에 똑같은 동 이름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인 한 인물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새로운 지명을 낳기도 했다.

지명의 유래를 유형별로 나누어 그중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지명들을 살펴보았다.

“부자” 는 어떻게 부자가 되는가?
예부터 발복지지(복을 받는 곳)와 금시발복(이번 생에 복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마을 지명 중에는 부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꿈에서 만난 여인이 자기 발을 묻어달라고 하여 시신을 묻고 제사까지 지내준 황씨는 경기도 가평군 이화리에서 황금화로를 얻어 부자가 된다. 스님의 말에 따라 황폐한 억새밭을 일구던 여씨는 금덩이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금덩이를 가지지 않고 절에 전해주었고, 여씨가 일군 밭에 사람들이 와서 잘살게 되니 이곳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막동 보화마을이다. 지나가던 지관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묫자리를 잘 써서 부자가 된 김씨도 있다. 김씨는 울산광역시 남구 흥성구만에 청어떼가 몰려와 구만석 부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마음보를 잘 써야 부자가 된다는 교훈을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자라도 마음보를 나쁘게 쓰면 망한다는 교훈이 담긴 지명도 있다. 천석 부자였으나 스님에게 시주하지 않고 편하게 돈 벌 궁리만 했던 부자 서천식은 망했고(충북 청주시 사창동 천석골), 집에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밥 차리는 게 힘들었던 박수인의 며느리(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입석리)와 홍개(세종시 금남면 홍개터)는 소원대로 손님도 사라지고, 재물도 함께 사라져 집안이 망한다. 이와 반대로 욕심쟁이 부자가 어느 날 깨닫고 돈을 나누어준(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비포) 이야기도 전한다. 결국, 부란 이웃과 나눌 때 영원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들이다.



부자 서천석이 살던 청주 천석골

고려1200 년대에 참깨 천석지기 서 씨가 청주에 살았다. 부지런하던 그는 점점 꾀가 나서 편히 놀고먹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탁발을 왔으나 시주는 하지 않고 편하게 놀고먹을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에 스님은 장정 30명을 구하라하고는, 그 장정들을 데리고 우마산에 가서 산허리를 끊어 길을 내었다. 그러자 서천석은 점차 가세가 기울어 3년 만에 망했다. 이후 이웃 마을에서는 천석지기가 살던 곳이라 해서 천석골이라 불렀다.

부자 서천식이 살던 청주시 사창동 천석골



청주에서 공업단지 서쪽으로 약 2㎞에 사창동이 있으며, 이곳에서 서쪽과 북쪽 사이에 천석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고려 말기에 이곳 천석골에 성이 서 씨인 큰 부자가 살았다. 그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참깨 씨를 천 석이나 뿌릴 수 있을 만큼의 넓은 땅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서천석이라 부르기도 했다. 서천석은 날이면 날마다 들과 밭으로 나가서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매고 물대는 일을 수없이 되풀이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차츰 이처럼 반복되는 일에 싫증이 났다. 그리고는 일을 안 하고 편히 앉아 먹는 방법이 없을까 매일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천석의 집에 노승 한 분이 탁발을 왔다. 그런데 서천석은 시주는 하지 않고 “스님, 일하지 않고 편하게 놀고먹는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스님은 “있지요.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해결해 줄 터이니 사흘 뒤에 다시 올 때까지 서른 명의 장정을 모아 줄 수 있겠소?” 이에 서천석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사흘 뒤에 내 다시 올 터이니 힘 있는 장정 서른 명을 꼭 데려다 놓으시오.”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홀연히 마을을 떠났다.

서천석은 스님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일을 하지 않고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스님의 말에 근처의 마을에서 장정 30명을 얻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약속한 날이 되었다. 노승이 나타나더니 아무 말 없이 30명의 장정을 데리고 마을 뒤에 있는 우마고개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장정들에게 “여기 계신 분들은 지금부터 이 산허리를 끊어 길을 내도록 하세요!”라고 마을의 풍수에서 중요한 부분인 마소허리를 자르도록 지시를 했다. 이에 장정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스님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했다. 이때 그곳을 지나던 지관이 잠시 지형을 살피고서는 놀라면서 노승에게 “왜 사람을 망하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 산은 우마혈이기 때문에 항상 재물을 등에 가득 실은 우마가 밑에 있는 서천석 집으로 들어가는 형세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스님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혈을 끊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에 뭔가를 느낀 지관은 서천석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다시 노승에게로 찾아와 “제가 스님 손에서 구해볼 생각으로 그를 만나보았으나 역시 그의 천운이 다 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스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스님은 다음날 산허리를 끊어 길을 내고 나서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후부터 서천석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짧은 기간에 서천석의 집안이 망한 것에 대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은 재산이 있다고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였기에 그리된 것이라 얘기를 한다. 이후 이 마을은 참깨 씨 천석을 뿌리던 서천석이 살던 마을이라 해서 오늘날까지 천석골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노승의 지시에 따라 끊어진 고갯길을 우마고개라 이름 붙여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자료 : 이영식 청주문화원, 충청북도 문화공보담당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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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