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기억, 남원 만복사지

만복사는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당시 남원성 전투시 소실된 후 1679년 (숙종 4년) 남원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금오 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만복사저포기"라는 한문소설을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으며 당시 만복사의 실상을 알게 했다.

남원 만복사지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찰에는 대웅전, 천불전, 영상전, 종각, 명부전, 나한전, 약사전이 있었으며 5층석탑, 석불입상, 당간지주, 석인상등이 있어 규모가 매우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절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의 지명이 있어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빨래를 널어 이곳이 온통 하얗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고,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남원의 8경 중 만복사 귀승이 있는데 시주를 마치고 저녁나절에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아름다운 경치로 꼽았다고 한다.

총면적 3,200평. 전북대학교 박물관이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쳐 발굴 조사함으로써 많은 건물지가 확인되고 다수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만복사는 창건 후 몇 차례에 걸쳐 중창되어 중문지(中門址) 목탑지(木塔址) 동서금당지(東西金堂址) 북금당지(北金堂址) 강당지(講堂址) 회랑지(廻廊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고, 규모가 제일 큰 서금당이 동불(銅佛)을 모셨던 주불전(主佛殿)이었음이 밝혀져 고려시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 구조와 형식을 알아볼 수 있는 유구가 남아 있어 사찰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만복사는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시 소실된 후 1679년 (숙종 4년) 남원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금오 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만복사저포기"라는 한문소설을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으며 당시 만복사의 실상을 알게 했다.

현재 절터에는 고려시대의 오층석탑(보물 제30호)과 석조대좌(石座, 보물 제31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32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 석인상(石人像) 등의 유물과 초석(礎石) 등의 석조물이 절터에 남아 있다.

또한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의 흔적과 청자와 백자, 토기 등의 기편(器片)과 금동불입상, 수막새 583점, 암막새 853점 등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만복사지 5층석탑 보물 제30호

높이 5.5m. 현재 4층 지붕돌까지 남아 있으며, 받침 부분의 구조는 명확하지 않지만 2층 받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층 받침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석재가 길 위에 드러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땅에 묻힌 부분은 별석(別石)의 바닥돌과 받침 면석(面石)이며, 각 면석의 가운데에는 가운데 기둥 하나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드러난 받침돌은 4변의 길이가 같은 네모난 돌인데, 각 면에는 넓은 모서리 기둥을 새겼고, 1장의 널돌을 덮개돌을 삼았으며, 덮개돌 아랫면에 두른 쇠시리인 부연(副椽)과 몸돌 굄은 표현되지 않았다.

1층 몸돌은 네모난 기둥 모양으로 비교적 높이가 높은 편인데, 각 면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얕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뚜렷이 구별되는데, 처마와 처마가 맞닿는 전각(轉角)에 이르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마치 목조 건물의 지붕 곡선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1단, 아랫면에는 2단의 받침이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모두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안정감을 주며, 지붕돌 역시 1층 지붕돌과 같이 낮고 넓으며 체감률도 매우 적은 편이다.

특히 이 석탑에는 2층∼4층 몸돌과 지붕돌 사이에 별석의 몸돌 받침이 들어가 있다. 몸돌 받침은 네모난 널돌로 아랫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윗면에는 1단의 몸돌 굄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보물 제166호),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 등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에 세워진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등으로 계승되었다. 몸돌 받침은 목탑에서 몸돌 주변에 난간을 두른 것과 같이 난간 부분이 퇴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만복사지 석조대좌 보물 제31호


1석으로 조성된 6각형의 연화대좌(蓮華臺座)로서, 원위치에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대(下臺) 위에 상대(上臺)를 마련하고 그 사이의 간주(竿柱)는 낮게 표현되었다. 하대 측면에는 각 면마다 2개의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새기고 중앙의 탱주(撑柱: 받침기둥)로 2분하였는데, 우주와 탱주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1단 낮은 선조(線條)를 새겼다. 각 면의 2분된 구간에는 안상(眼象)을 오목새김하고, 안상 안에는 귀꽃 모양의 화형문(花形文)을 새기고 하부에는 1단의 받침을 새겨 측면받침으로 삼았다. 상부는 갑석(甲石) 모양으로 테를 마련하고 그 위의 경사진 상면에 복엽(複葉)의 복련(覆蓮)을 조각하였는데, 윗면에 중대받침을 조각하였다.

중대(中臺)는 양쪽에 우주,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두 부분으로 구획되었는데, 안상 등의 장식은 없고 마멸이 심하여 각 주형(柱形)의 조각이 뚜렷하지 않다. 중대 상단에는 하부와 상대하여 1단의 상대굄을 마련하였으나, 상대의 앙련(仰蓮)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어 어떠한 형태인지 잘 알 수 없다. 상면은 평평할 뿐 별다른 장치는 없으며, 중앙에 1변 길이 30㎝의 방형 구멍이 있어서 여기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좌대(座臺)는 방형 혹은 8각, 원형 등이나 이 석좌는 6각형으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다. 하대 각 면의 우주와 탱주 가장자리에 선조를 장식한 것이라든지 안상의 안쪽에 귀꽃형 화문을 장식한 수법 등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서, 이 석조대좌의 조성 연대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32호


높이 3m.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의 왼쪽 언덕 아래 세워져 있는데, 원 위치로 추정되며 원래 상태대로 두 지주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표면에는 조각이 없으며, 정상부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사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지다가 외면과 접하는 모를 죽여 그 부분만을 둥글게 하였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상·중·하 세 군데에 장치하였는데,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간을 시설하도록 하였다. 중·하부는 모두 원공(圓孔)으로, 중부는 상부의 간구에서 1m 쯤 내려와 있는데 서쪽 지주는 외면까지 관통되었으며, 하부는 하단 가까이에 구멍을 뚫어서 중간부와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아래부분이 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고, 간대(竿臺)나 기단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전체적으로 정제된 인상은 주지 않는다. 이 곳 절터에 남아 있는 여러 점의 석조물들이 모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이 당간지주 역시 각 부의 양식이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43호  (앞면과 뒷면)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肉髻)가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공(白毫孔)이 새겨졌다. 눈과 코는 손상되었다. 인상에서 주는 부드러운 느낌과 얼굴의 풍만감은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江陵神福寺址石造菩薩坐像, 보물 제84호)과도 친연성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손은 결실되었다. 원래는 손을 따로 만들어 손목에 끼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짓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움츠린 듯한 양어깨는 좁고 하체가 다소 빈약한 편이다.

광배는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윗부분이 깨졌지만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안에 새겨진 연꽃 줄기가 선명하고, 외연부는 화염문과 화불(化佛)이 조각되었으며 광배와 불신이 하나의 석재로 제작되었다. 보물 제43호로 지정되여 규모가 비교적 클 뿐 아니라 제작 시기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기에 문화재로서 매우 가치가있다.

이 조각은 형식화된 옷주름이나 대칭적인 불의의 양 깃, 넓게 열린 편평한 가슴과 신체 등의 어색한 표현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 규모나 기법 면에서 당시의 조각으로는 뛰어난 작품이다. 현재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 및 석조대좌와 함께 만복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석인상​

만복사지 석인상은 본래 만복사지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00cm 떨어진 곳에 2기가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어 사고위험이 높은 1기의 석인상을 이곳으로 옮겼다. 석인상의 형태는 사각형의 돌기둥에 3개의 면만을 이용하여 사람 형상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은 편평하게 다듬었다. 다듬은 면에는 두개의 구멍이 확인되었는데, 위쪽 구멍은 머리 정상부에서 아래쪽으로 122cm, 두 번째 구멍은 318cm 내려온 곳에 있다. 석인상의 머리부는 정상부가 둥글고 볼록하게 솟아 있으며, 얼굴은 안구(眼球)를 심하게 돌출시켜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다. 몸통부는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체(半裸體)이며, 오른손은 완전히 구부려 주먹에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물건을 쥐고 있다. 군의(裙衣)는 허리부분에서 묶어 상단부 옷자락이 밖으로 뒤집혀 늘어뜨렸으며, 옷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게 돌출시켰다. 하반신은 수직으로 늘어뜨린 옷주름에 가려졌고 다리부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다리의 아래쪽은 대좌(臺座)를 사용하지 않고 사각형의 돌기둥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석인상의 전체 높이는 550cm이며 머리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는 370cm 내외이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대략적인 줄거리



전라도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梁生)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의 구석방에서 외로이 지냈다. 배필 없음을 슬퍼하던 중에 부처와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 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여인의 부모를 만나게 되고, 여인이 이미 죽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 절에서 여인은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그녀를 잊지 못하는 양생은 가산과 농토를 모두 팔아 저녁마다 재를 드렸는데, 하루는 그녀가 공중에서 그를 부른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다.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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