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3대 패전

역사에서 우리나라 전체를 유린당한 전쟁은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20세기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것 등은 분명한 역사적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3대 패전
몽골패전, 칠천량패전, 삼전도굴욕 세 가지이다.


역사에서 우리나라 전체를 유린당한 전쟁은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20세기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것 등은 분명한 역사적 현실이다.

우리의 왕을 승전국이 임명한 몽골간섭기
7년 동안이나 전국토가 짓밟힌 임진왜란, 그리고 정유재란
조선의 왕이 무릎을 조아리고 술잔을 바침으로써 끝난 병자호란.
나라가 일본에 합병 당한 조선의 멸망

이렇게 당한 국가적 재난이라면 마땅히 결정적으로 패한 전투가 있을 법한데 없다. 단군 이래 최대 치욕은 조선이 멸망하여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 경술국치였다. 그것은 제국주의로 팽창하던 일본의 본격적인 아시아 침략 신호탄으로, 조선이 군대를 모아 저항하기는커녕 일본군에 저항하던 의병을 반란군으로 간주하여 관군이 제압했다. 마땅히 싸워야 할 적국 일본에게, 도리어 빌붙어 눈치만 보던 매국적 행위 끝에 조선은 허망하게 망하고 말핬다.
물론 경술국치는 제국주의 국제질서에 따른 열강간 타협의 산물인 점도 있다. 미국과 일본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필리핀과 조선을 나눠 먹었고 러일전쟁은 조선에 입맛을 다시던 러시아를 당시 세계 최강 영국의 지원 아래 일본이 이긴 전쟁이다.

우리 역사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여 전쟁의 대세를 바꾼 큰 승리도 없었지만 전력을 다한 대규모 전투에서 패한 적도 없으니, 우리는 한 번도 외적을 상대로 국운을 건 전투를 해본 적이 없다. 몽골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적이 대규모로 침공해왔을 때 임금과 조정은 일단 도망갔다가 적과 협상하는 비겁한 자세를 보였다. 말이 협상이지 전국토의 백성이 적군에게 짓밟히고 의병들이 곳곳에서 항전하는 것을 지켜보며 적이 물러가기만 바라다가 궁지에 몰려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적 근거에서 한번 살펴보자


1. 몽골패전

몽골은 13세기 초중반 고려에 침입했다. 고려가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것은 제3차(1235~1239) 침입이었다. 이때 대구 부인사 초조대장경과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등 전국토가 몽골군에게 유린되었으며 수 없이 많은 백성이 죽거나 잡혀갔다.

1231년 몽골의 첫 번째 침입부터 겁을 먹은 고려조정은 바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지구전에 돌입했다. 권력을 잡고 있던 군부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웅거한 채 몽골과의 대결을 피했고 전국의 승려와 농민 등이 산발적으로 저항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100년간 지속된 최씨 정권이 무너진 이듬해인 1258년(고종 45년) 고려는 몽골과 강화협상을 맺었고 비로소 7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이 끝났다. 그리고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몽골간섭기, 준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것을 의미한다.

1275년 충렬왕을 시작으로 1352년 공민왕 이전까지 충(忠)으로 시작하는 6명의 왕들은 몽골이 임명했고 왕비가 몽골인이었으며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아버지가 몽골세력에 의지해 다시 왕이 되는 등 독립왕조로 보기 힘든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만주지역에 사는 고려인을 다스리던 심양왕(심왕)이 고려왕위를 엿보는 등 왕의 체통이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충자가 들어간 고려 왕’

제 25대 충렬왕(1236~1308)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1259~1297)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 1272년 윈 나라에 입조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 결혼 원의 부마가 되었다. 1274년 원종이 죽자 귀국하여 고려 25대 왕에 올랐다.

제 26대 충선왕(1275~1325)
전지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시기에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인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자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소생

제 27대 충숙왕(1294~1339)
충숙왕은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 충숙왕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녀 의비 소생

제 28대 충혜왕(1315~1344)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를 맞게 한다. 충혜왕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저 포악하여 정사는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제 29대 충목왕(1337~1348)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녕공주의 섭정을 거쳤다. 충목왕은 충혜왕의 맏아들이자 정순숙의공주 (덕녕공주) 소생이다.

제 30대 충정왕(1338~1352).
충혜왕의 둘 째 아들이자 희비의 소생으로 짦은 치세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편 개경환도로 주권을 상실하자 무인들이 들고 일어나 대몽항쟁에 나섰는데 이들이 삼별초이다. 그러나 삼별초군은 고려 정부군과 몽골군에게 패해 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밀려났다가 1272년 소멸했다. 삼별초는 몽골의 휘하로 들어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저항한 군대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왕족을 왕으로 삼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군대를 일으킨 장수가 스스로 왕을 칭하지 않고 왕족을 왕으로 세운 것은 '몽골괴뢰정권'을 부정하고 나름대로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한 행동이었다.

이를 우리 역사에서는 ‘삼별초의 난’이라고 쓰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처사이다. 외세에 저항한 애국 무장단체를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나라가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공식적으로 고려왕조를 계승한 '충'자 돌림의 왕 입장에서는 반란으로 보였겠지만 민족사적 의미로 볼 때는 삼별초가 고려왕조를 계승했으며 '몽고를 위한 충성 충'자가 들어간 왕은 괴뢰정권에 불과하다. 삼별초가 자기들 마음대로 왕을 세우고 대항했다고 해서 반란군이다? 지금이라도 삼별초 항쟁은 재해석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괴뢰정권에 반발해 독립투쟁을 벌인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저항을 프랑스에서 반란이라고 하는가!

몽골은 고려의 왕을 임명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점령했는데 이때 잃은 땅은 공민왕 때 회복했다. 공민왕 시절은 몽골족의 원나라와 고려가 모두 망국의 길에 접어들었으니 우리가 몽골을 물리친 게 아니다. 두 나라가 쇠약해지고 공백기가 생기자 그 틈을 타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2. 칠천량 패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반도는 왜군의 침략에 의해 전화에 휩싸였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해전에서만큼은 연승하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조선이 해전에 자신감을 얻은 상황에서 1596년 겨울, 가토 기요마사군의 재침략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조정은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수군에 공격명령을 내리지만 당시 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적이 전해준 정보라는 것과 이미 상륙한 왜군을 제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결국 옥에 갇힌다. 그 이후로 유명한 백의종군. 후임에 오른 원균 역시 출전을 꺼려했지만 결국 1597년 음력 7월 4일,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함 200여척을 이끌고 억지로 출전. 조선 수군이 한산도를 출발해 칠천량, 옥포, 다대포를 거쳐 계속 동진한 동안 의외로 훨씬 병력이 많은 일본의 수군은 계속해서 후퇴를 한다. 승기를 잡았다고 오판한 원균은 왜군을 맹렬히 추격했고 부산포 앞 저도 인근 해상에서 왜군이 돌연 반전, 조선 수군을 공격한다. 이 와중에 20여 척의 판옥선이 파손당하고 격군이 지쳐 추진력을 잃은 일부 판옥선이 표류해 떠내려가 노획/격파당하기도 한다.

<칠천량 주변의 지도 / 일본 측에서 그린 칠천량 해전의 기록화>

전초전에서 패퇴한 원균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수로로 퇴각해 배들을 정박시키고 방치한다. 술을 퍼마셨다는 말도 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청했으나 이대로 후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원균은 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7월 15일 밤,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칠천량을 급습한다. 수군통제사인 원균은 전투 도중 우왕좌왕하며 도주, 전라우수사인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는 끝까지 분전하다 장렬히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일부 판옥선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주한다. 도주한 원균은 심지어 한산도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주하란 명을 내려 사실상 수군을 포기한다. 정신없이 도망가던 원균은 결국 왜군을 만나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나중에 이순신이 전투에서 도주한 배설을 죽도록 패지만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전부가 되었다.

<1995년에 그려진 원균의 초상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원균의 모습>
- 후세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그의 리더쉽 부재가 칠천량 대패를 불렀다 -

이 말도 안 되는 패전은 지휘관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분명 1년 전까지만 해도 이순신의 지휘아래 동북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했던 조선 수군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또한 전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정이 어설프게 개입한 것 역시 조선 수군에 재앙을 선사했다. 칠천량 해전 이후 일본 수군이 남해안에서 제해권을 갖게 되어 육상에서 진격 중인 왜군 역시 마음대로 전라도를 유린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거제도와 칠천도를 잇는 다리가 놓여진 고요한 칠천량 > 칠천량 해전이 이순신 장군에게 크나큰 시련을 줍니다. 그의 명언을 새긴 해군2함대사령부의 비석 (출처: 국방일보)>

삼도수군이 하루아침에 ‘증발’한데에 기겁한 조정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복권시킨다. 자신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육성한 수군이 사라진 것에 피눈물을 흘린 이순신은 그나마 배설이 도주하면서 데려온 판옥선 12척으로 수군을 재건한다. 지금의 해군 2함대사령부 정문의 기념비석에 새겨진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남아있나이다.’라는 명언은 이때 나왔다. 한순간이었던 일본 수군의 전성기도 약 2개월 후 칠천량에서 서쪽으로 200km 떨어진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13 대133의 신화를 쓰며 산산조각난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이 승승장구하다가 조명연합군의 반격과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밀리자 몇 달만에 전쟁 양상은 명나라와 왜군의 지루한 협상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왜군은 조선 각지에 성을 쌓고 웅거하면서 사람과 물자를 약탈했다. 왜군이 전력을 정비하여 다시 공세에 나선 것이 1597년 정유재란이다. 칠천량 패전은 정유재란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왜 수군에게 궤멸당한 전투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조건 진군하여 왜군을 격파하라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갇혀있었다. 왜 수군의 본진은 부산에 있었으며 일부 왜 함대가 남해안에서 활동했다. 이순신의 후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성급하게 부산쪽으로 진군하며 왜군을 공격했다가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잃었다.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전승했던 전라좌수영 주축의 조선수군의 첫 패전이었다. 원균은 이 일로 도원수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까지 맞았다.
치욕을 당한 원균은 왜군을 치기 위해 1597년 7월 조선수군 전병력 160척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도리어 왜 수군에게 밀려 거제도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다가 칠천량에 포구에 정박했다.

7월 15일 조선 수군은 왜 육군과 수군의 합동 기습공격을 받고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거북선을 포함한 전 전함이 불탔다. 일부 수군은 육지로 도망갔다가 왜군에게 죽거나 항복했고 원균과 전라우수사, 충청수사 등도 이 과정에서 전사했다. 조선 수군이 궤멸당한 칠천량 패전은 경계를 게을리 했다가 야간 기습을 받은 어이없는 패전이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버리고 남긴 빈 전함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한산의 무너짐’은 참으로 허망한 패전이었다. 조선수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전력의 90% 이상을 하룻밤 만에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원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변명하지만 당시 상황과 왜군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조선 수군을 허무하게 몰살시킨 1차원인은 총사령관인 원균에게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용장 밑에 졸병 없고 졸장 밑에 용병이 없는 법이다. 이순신이 왜 부산을 치지 않았는지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았고,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때와 장소를 선택하는 지혜도 없었고, 적의 기습에 대한 방비도 하지 않았으며, 수군이 배를 버리고 육지에서 싸운 멍청한 원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장수이다.

나중에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함께 임진왜란에 활약한 ‘1등 공신’으로 지정된 것은 편협하고 비겁했던 컴플렉스 소유자 선조와 원균의 조정 내 비호세력의 덕으로 보인다. 서자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정통성이 없다는 점 때문에 자기 왕위가 위태롭다는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능력이 있고 조정과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이순신을 항상 경계했다. 반면에 단순무식형에 생색내기 좋아하던 원균을 총애한 것으로 보인다.

이 칠천량 패전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은 상황이 불리하자 전선을 이끌고 도망갔다. 이렇게 해서 불타지 않은 조선수군의 주력함 판옥선이, 후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왕에게 올린 장계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있나이다”의 바로 그 배들이었다. 패전을 예상하고 도망간 배설의 판단이 그나마 조선수군의 명맥을 이었던 것이다.


3. 삼전도 굴욕


조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든 임진왜란이 끝난지 채 40년이 안되어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17세기 초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후금은 서서히 망해가는 명나라의 북쪽 영역부터 점령했다. 후금은 배후에 있는 조선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고 무리한 전쟁물자를 요구했다. 정묘호란에서 일단 후금에 굴복했지만 여전히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은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게 신하국의 예를 강요하면서 청에 비협조적인 조정대신의 압송을 요구하는 등 압력을 높였다. 조선이 거듭되는 청의 요구를 계속 거절하자 마침내 1636년 12월 청태종이 직접 조선정벌에 나섰고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한양이 청군 손에 떨어지고 남한산성이 포위될 때까지 청군은 제대로된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 도성 근처의 조선군은 모두 항전을 위해 남한산성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고립된 왕을 지키기 위해 지방의 조선군을 결집해야 했다. 충청, 강원의 조선군은 개별적으로 남한산성을 향하다가 청군과 접전, 축차 소모되어 집결하지 못하였지만 남부지방에는 상당한 조선군 세력이 보존되어 있었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은 도합 4만에 가까운 조선군을 모아 왕을 구원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그리고 산성이 포위된 지 약 2주후인 12월 30일경, 쌍령에 도착한다.


<인조의 구출을 위해 경상도에서 남한산성으로 진군한 조선군 ~지금은 3번 국도가 지나는 경기도 광주 인근의 쌍령고개 (출처: 네이버지도)>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쌍령은 크고 작은 두 고개를 가리킨다. 각각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두 무리의 조선군은 각각 고개 양쪽에 진을 쳐 목책을 세운 후 타지에서 집결할 조선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조선군에 대응해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던 청군 6천 가량이 지금의 곤지암인 현산을 점령하고 쌍령으로 척후를 보낸다.

<조선 풍속도 속 포수의 모습 / 청의 주력이었던 ‘팔기군’>


임진왜란 때 조총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던 조선군은 꽤 많은 군사들을 조총으로 무장시킨 상태였다. 활이나 검, 창에 비해 많은 훈련 없이도 상당한 위력을 보이는 조총이지만 대규모 전투에서는 대형유지, 사격통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했고 당시 조선군은 이러한 훈련은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청의 척후병이 쌍령으로 접근하자 조총을 소지한 조선군 포수들은 조총을 연속 방포해 청군 척후의 기세를 꺾는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상황에서 마구 조총을 쏜 탓에 개인이 소지한 화약을 모두 소진해 화약을 더 달라고 우왕좌왕 했고 이를 본 청군이 목책을 뛰어넘어 조총대를 유린했다. 전통적으로 백병전에 약하고 훈련도 부족한 조선군인지라 청군이 목책을 넘자마자 어이없게 붕괴하고 만다. 처음 접적한 진영을 지휘했던 허완은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도망치는 와중에 말에서 떨어져 압사당했다고 한다


<후금의 기병을 저지하는 조선의 궁병과 포수 / 20세기 전의 총병대에겐 대열 유지가 가장 중요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Thin Red Line>



이에 비해 민영의 진영의 비교적 정돈되어 조총으로 청군을 잘 저지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도 상당히 우세했으므로 성공적인 방어의 기세가 보였지만 또다시 포수들의 화약이 동나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화약을 재분배하기 위해 진영 한가운데에서 화약을 분배하다가.. 그만 화약이 화승의 불꽃에 닿는 사고가 발생. 폭사한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민영의 조선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이를 바라보던 청군의 기병 300여기가 일제히 돌격, 전군이 전멸하고 지휘하던 민영 역시 전사한다. 청군의 돌격 때는 실제 청군 기병에 찔리고 베이거나 밟혀 죽은 것 보다 무질서하게 도망치다가 압사당한 조선군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기록이 애매한 점이 있어 청군의 병력이 300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포로 무장한 압도적인 병력의 조선군이 제대로 된 전투도 벌이지 못한 채 와해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636년 1월 3일, 남한산성의 인조를 구출할 수 있었던 조선의 4만 대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식량이 떨어져가고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왕족이 사로잡히자 인조는 이듬해 1월 30일 청태종에게 항복했으니 이른바 삼전도 굴욕이다. 인조가 무릎을 꿇은 채 청태종에게 절을 하고 술잔을 올렸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굴욕을 당한 왕은 인조가 유일하다. 쌍령의 대패 이후 채 한달이 되지 않은 1월 30일, 인조는 청에 항복하고 한민족 최대 굴욕 중 하나인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삼국시대에도 전사한 왕들은 있었지만 인조처럼 비굴하게 항복하진 않았다. 


항복조건 중에는 신하의 나라를 맹세하고 명나라와 관계를 끊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청과 싸우자고 주장했던 선비(삼학사) 등을 인질을 보내며 명나라에 정벌군을 보내고 조선의 성을 보수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조선이 청나라에 병합되지 않은 게 다행으로 보일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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