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산수를 약동하는 국토로 보물 이인문 필 강산무진도

이인문의 속에 펼쳐진 숲은 침묵의 공간이 아니라 활발한 유통과 첨단 기술이 살아 숨 쉬는 개척과 번영의 현장이다. 배와 수레가 오가고 나귀가 누비는 역동적인 문명의 길을 품어 안아 인간의 삶을 담는다.
은거의 숲을 깨운 파노라마,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다


       고요한 산수를 약동하는 국토로 보물 이인문 필 강산무진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속에 펼쳐진 숲은 침묵의 공간이 아니라 활발한 유통과 첨단 기술이 살아 숨 쉬는 개척과 번영의 현장이다. 배와 수레가 오가고 나귀가 누비는 역동적인 문명의 길을 품어 안아 인간의 삶을 담는다.
은거의 숲을 깨운 파노라마,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다

옛 그림의 감상과 수집을 담당한 계층은 주로 상류층 남성들, 즉 정치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독서하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의 학문과 철학이 정치계의 현실과 충돌할 때 산수화(山水畵)는 특유의 역할을 수행했다. 산수(山水) 혹은 강호(江湖)의 평온한 이미지는 현실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난 이상(理想)이 구현된 공간으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산수화는 자연 세계의 사실 묘사보다는 현실계의 번잡과 명리 추구를 초극한 공간의 시각화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흔한 산수화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골짜기와 바위 위에 홀로 앉은 학자, 현실을 떠나 은거하는 인물이 비현실적으로 반복된다. 정결한 산수에 머무는 상상, 그런 산수에 대한 애호라는 자기 표상의 의미 속에서 산수화는 오랫동안 남성 학자들에게 사랑받았다. 산수 절경을 방문한 진경산수화도 산수는 곧 이상이라는 전통적 공식 속에서 긍정적으로 미화될 수 있었다. 요컨대 전통 속 산수화는 현실계와 구별되는 이상적 공간의 구현으로 자리잡아 왔다.


총 길이 8.5m의 장대한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강산무진도>의 첫인상은 기암괴석과 강호가 끝없이 펼쳐진 산수풍경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관람자가 되어 오른손으로 말고 왼손으로 펴면서 화면의 흐름을 가까이서 들여다본다면, 그림 속 서사가 전통의 산수화 너머에 있다는 데 흠칫 놀라게 된다.

          나귀와 수레가 이어지는 풍경    01.도르래를 이용하는 모습


소나무 언덕에서 시작해 곧 상단에 세밀하게 그려진 원경(遠景)이 눈길을 끈다. 저 먼 언덕들을 지그재그로 잇도록 축조된 교량들, 그 위로 물량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희미하지만 세밀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수십 척의 배가 운집한 물가이고, 어망(魚網)을 올리거나 어획물을 옮기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다음은 산속의 장터로 모여든 나귀와 수레, 이 언덕에서 저 높은 언덕 위로 물자를 올리느라 도르래를 돌리며 환호하는 사람들, 기암괴석 구석구석에 번듯하게 등장하는 마을들, 폭포 뒤 멀리 멀리까지 지어진 가옥들, 비탈을 오르고 내리느라 바쁜 나귀들, 산속 다리 위로 짐을 옮기는 사람들, 산속 곳곳에 자리잡은 번듯한 기와집 마을들이 인사하듯이 나타난다.

마침내 배산임수 너른 터의 도읍이 훤하게 펼쳐지면서 서사는 절정에 달한다. 궁궐 지붕이 우뚝하고 기와집이 즐비한 이 도읍의 남쪽에는 커다란 수문이 축조되어 있고 배가 즐비하게 움직인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잔잔한 물가인데, 물가 집집마다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그림의 마지막 순간까지 넘치는 활기 속에 숨가쁘게 차오른 흥분감은 화면을 다 말도록 가라앉지 않는다. <강산무진도>에는 은거할 산수가 없었다. 고요한 산수와 번잡한 현실의 경계가 완전하게 허물어져 있기 때문이다.

           02. 배가 정박한 도시 풍경   03. 마지막 물가의 집들   04 .다양한 선박이 그려져 있다.

<강산무진도>를 그린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은 정조(正祖) 대 왕실 직속 화가 그룹인 차비대령화원에 속하여 생년이 같은 김홍도(金弘道, 1745~?)와 최고 수준의 화가로 인정받으며 활동했다. <강산무진도>가 제작된 경위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운 비단을 길게 잇고 정교한 필치로 그린 규모와 정성을 보건대, 왕실의 요구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특별한 주문에 따라 제작된 그림이었음이 분명하다. 주문의 의도는 이 그림에 특이한 요소인 배와 수레, 나귀들에서 추정할 수 있겠다.

<강산무진도>에 그려진 배는 백 척이 넘는다. 물자수송용 조선(漕船), 고기잡이용 어선(漁船) 혹은 ‘조방(漕舫)’으로 불린 중국식 조선 등으로 보인다. 그 시절 한양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방법은 육로보다 수로가 안전하였다고 하니 왕과 학자들은 모두 선박 제조에 관심이 컸다. 정조가 조선시대 선박을 자세히 설명하고 선박 제조의 제도 개선이 급선무라 지시한 어명이 『홍재전서』에 전한다. 이는 안전하고 신속한 유통구조에 대한 바람이었다.

수레 또한 그림 속에 적지 않게 등장한다. 학자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은 『우서(迂書)』에서 베이징에는 이고 진 사람이 없다고 감탄했다. 그들은 개인용 수레 혹은 어깨에 거는 멜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숙종 대 병조판서 민진후(閔鎭厚, 1659∼1720)는 베이징에서 본 독륜거(獨輪車, 외발 손수레)를 응용하여 양륜거(兩輪車, 두발 손수레)를 만들어보았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개인용 수레는 상용되지 못했고, 발전 지향적 학자들의 진지한 안타까움만 불러일으켰다. 국왕 정조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 연행기록에서 학자들은 중국의 다양한 수레와 바퀴 응용을 거듭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라. 여인들은 커다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남성들은 지게를 지고 간다. 이렇게 이고 진 풍경은 근대기의 사진에도 여전히 등장한다.


             05. 나귀를 타고 비탈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06.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들   07. 산속 폭포 뒤편으로 구축된 마을


<강산무진도> 속 동물은 오로지 나귀이다. 그림 속 나귀들은 짐을 싣고 산과 골짝을 누비다가 장터에서 여물을 먹는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나귀는 찾을 수 없고 오직 말 혹은 소가 등장할 뿐이라, 우리나라는 “우마(牛馬)만을 키울 줄 알고 노새를 번식시킬 줄 모른다”고 탄식한 『유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로 보아 <강산무진도>는 나귀의 효율성을 주장하고 있다.

수륙의 운송시스템이 완비되고 땅끝마을까지 에너지 발전의 시스템이 마련된 나라, 수려한 산수 속 모든 지역이 고르게 발달되고 유통이 이루어지는 국토, 수레와 배가 멀리 뻗어나가는 비전. 18세기 말 혹은 19세기 초의 어느 지점에서 꿈꾸어진 조선의 이상이 <강산무진도>에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수레와 배가 있어도 다니지 않는다’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동아시아 전통 유토피아상을 초극하고, 현실과 괴리된 한적한 산수(山水) 개념을 깨뜨린 산수화였다는 점에서 몹시 흥미롭다. 출처 / 고연희(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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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