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전라도

의향(義鄕), 예향(藝鄕), 미향(味鄕)의 고장 ‘전라도’

역사 속 전라도

의향(義鄕), 예향(藝鄕), 미향(味鄕)의 고장 ‘전라도’

전라도(全羅道)는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3개 광역자치단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과거에는 마한에서 백제에 편입됐고 신라에서 후백제에 이어 다시 고려에 복속됐다. 983년 고려 6대 임금 성종이 전국에 12목(十二牧)을 설치하며 강남도(江南道) 전주목을, 해양도(海陽道) 나주목을 두었다. 1018년 고려 8대 임금 현종(顯宗)이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글자를 따서 부르던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라도는 1896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리됐고 1946년 제주도가 독립했다. 1963년 금산군과 논산시 일부가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넘어갔다. 광주는 1987년 직할시로 승격됐고 1995년 광역시로 개편됐다. 2005년 전남도청이 광주에서 무안으로 이전했다. 벽골제(碧骨堤) 남쪽에 있는 지방이라 호남(湖南)이라고 한다. 전라도는 북쪽의 금강, 동쪽의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충청도와 경상도와 구별한다.



태조 왕건의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의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에 의해 전라도는 오랫동안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풍수지리설의 비조인 도선국사, 개국공신인 신숭겸, 여섯 임금을 보필한 최지몽, 태조 왕건의 왕비이자 2대 혜종의 생모인 장화왕후,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 등 3명의 생모인 공예태후 등이 전라도 출신이다. 심지어 고려 현종은 거란족이 침입하자 전라도 나주로 몽진했다.

이순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에서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등 수많은 의병장이 일어났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며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하였다. 척양척왜의 동학농민혁명과 고광순, 안규홍, 양윤숙 등 수많은 의병장이 일제 침략에 저항했다. 또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면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민주혁명, 5·18민중항쟁 등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조선독립광주신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호남지방은 시서화의 본고장으로 해남 녹우당에서 윤선도는 어부사시사를 남겼고 윤두서는 자화상을 남겼다. 정약용은 강진 다산초당에서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무등산 인근에서 정극인은 상춘곡, 송순은 면앙정가, 정철은 성산별곡 등의 가사(歌詞)를 남겼다. 신재효가 정립한 판소리 서편제와 동편제가 남도 가락을 대표한다. 진도 운림산방의 허련부터 광주 춘설헌의 허백련까지 남종화가 꽃을 피웠다.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어부사시사

500여만 명이 거주하는 전라도는 광역시인 광주와 특례시인 전주를 비롯해 익산, 순천, 여수, 군산, 목포 등이 인구 20만 명이 넘는다. 호남평야와 나주평야의 농산물과 더불어 서남해안의 해산물이 풍부하여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광주 한정식, 전주 비빔밥, 나주 곰탕, 담양 떡갈비, 남원 추어탕, 벌교 꼬막, 영암 세발낙지, 영광 굴비, 흑산도 홍어 등이 유명하다. 궁중요리가 유배지로 전해져 전라도 음식은 독특한 맛이 있다.

2인분 정식

전라도, 남도답사 일번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인해 강진, 영암, 해남 등은 ‘남도답사 일번지’로 전국에 알려졌다. 밤바다가 아름다운 여수, 생명이 살아있는 순천, 한옥과 어우러진 전주, 근대문화의 산실 군산, 대나무의 담양, 천년고찰 송광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필암서원 등 전라도는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전라도에는 지리산, 내장산, 무등산, 월출산, 다도해상, 한려해상, 변산반도 등 아름다운 국립공원이 있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전라도에는 전해지고 있다. 암담살이 안규홍이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동부 6군에서 인재가 모여드는 순천에는 인물이 많았고, 철길과 뱃길이 연결된 여수에는 부자가 많았다. 의향(義鄕), 예향(藝鄕), 미향(味鄕)의 전라도는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고장이다. 우리가 먼저 우리 고장을 사랑해야 한다.  자료 서일환 박사 참조,  사진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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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