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 마음에 먼저 품는 좋은 것

좋은 뜻을 담은 상징이나 이를 가까이에 두고 기원하는 것을 길상(吉祥)이라고 한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담긴 길상에서는 우리 민족이 염원하던 행복의 모양이 가만히 비친다.

길상, 마음에 먼저 품는 좋은 것

좋은 뜻을 담은 상징이나 이를 가까이에 두고 기원하는 것을 길상(吉祥)이라고 한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담긴 길상에서는 우리 민족이 염원하던 행복의 모양이 가만히 비친다. 어떤 행복을 어떻게 바라고 이룰 것인가. 그 위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을 겹쳐 보는 새해다.

                                       김홍도(金弘道, 1745-1816 이후), 수노인도, 조선

한 해가 닫히고 열리는 겨울은 재미있는 계절이다. 추위에 옷깃은 꽁꽁 여며도, 사람들과 나누는 인사는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말들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도 건강하고 넉넉해지길 빌어주길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 역시 올해는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응원하기도 한다. 그 말들 속에 담긴 행복의 염원을 짚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국가유산 속 길상(吉祥)이다.

길상은 좋은 뜻을 담은 상징을 가까이 두며 기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해와 관련된 길상으로는 세화(歲畵)를 그려 새해를 기리고 축하하던 것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도화서 화원들이 진상한 세화를 임금이 궐 안팎에 나누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조선 말기가 되면 한 해에 제작하는 양이 700여 장에 달할 정도로 중요한 연례행사가 되고 민간으로도 새해가 되면 세화를 붙이는 유행이 퍼졌다.

세화의 소재로는 신선과 십장생, 모란, 토끼 잡는 매 등이 쓰여 건강과 복을 기원하고 부정한 것을 쫓는 주제를 표현했다. 신선 중에서도 수노인(壽老人)은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왕과 백성들에게 장수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겨져 세화에 자주 등장했다. 김홍도가 남긴 신선 그림 중에도 작달막한 키에 머리가 길고 흰 수염이 덥수룩한 수노인을 묘사한 작품이 전한다.

                                 01.박쥐무늬를 그린 청화백자 대접,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02.백자 청화 수복무늬 사각 병, 조선, 높이 14.6cm ©국립중앙박물관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장수를 뜻하는 십장생과 복숭아, 자식을 많이 얻는 것을 뜻하는 포도와 석류처럼 길상 중에는 오늘날의 한국인에게도 여전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많다. 길상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차곡차곡 쌓여 온 상징이지만, 특히 조선 후기 이후 기복(祈福) 문화가 유행하며 옛사람들의 일상 공간 곳곳에 자리 잡았다. 민화, 복식과 장신구, 목기와 금속기 등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공예품은 장수와 부귀, 출세, 부부의 금실과 자손 번성을 바라는 상징으로 가득하다.

                                 03.백자청화동채양각십장생무늬병,조선,높이32.4cm ©국립중앙박물관
                                 04.고종이 존 윌리엄 제중원 원장 헤론에게 하사한 자수 화초 길상무늬 병풍의 제8폭,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특히 도자기에 장식된 길상무늬는 행복과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십장생무늬를 양각한 병은 높이가 30cm가 넘는 커다란 그릇이다. 무늬에는 푸른 청화 안료를, 바탕에는 붉은 동화 안료를 칠했다. 이 장식 기법은 얼핏 사진으로 보기엔 아기자기해 보이지만 실제로 눈앞에 두고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 박력을 자아낸다. 한편 박쥐무늬는 당시 인기 있던 길상 중 하나로, 이전에는 그림이나 물건 가장자리에 조금씩 장식되던 것이 아예 그릇 전체 면에 가득 시문(도자기에 문양을 넣는 작업) 되기도 했다. 그런데 척 보아도 꽃이 크고 화려해서 부를 의미하게 된 모란이나, 열매와 씨앗이 많이 맺혀서 번성을 뜻하게 된 석류나 오이 등과 달리 박쥐가 길상으로 여겨진 이유는 생김새나 수명, 습성과는 관련이 없다. 박쥐의 한자 이름인 편복(蝙蝠)에 복(福)과 발음이 같은 한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예 그림 대신 수(壽)자와 복(福)자만 빼곡하게 써넣은 수복무늬 병은 어떠한가.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꼭 있을 거야’ 하고 직진하는 어린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듯한 단순하고 우직한 마음이 담겨 있다.

                  05.고종이 존 윌리엄 제중원 원장 헤론에게 하사한 자수 화초 길상무늬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06.자수 화초 길상무늬 병풍의 수본 제8폭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호화로운 붉은 공단에 꽃병과 화분, 글자를 정교하게 수놓은 여덟 폭짜리 병풍이 있다. 고종이 존 윌리엄 헤론 제중원 원장(1856~1890)에게 하사했던 것으로, 방 안 머리맡에 두고 쓰는 침병풍(枕屛風)이다. 왕이 선물한 아름다운 병풍 밑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는 기분은 어땠을까. 아픈 이들을 돌보며 고단한 하루를 보내도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는 향기로운 꽃이 가득한 귀한 잔치가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병풍과 같은 무늬가 그려진 그림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수본(繡本)이라고 부르는 자수 도안으로 다채롭고 정교한 표현으로 보아 궁중 화원의 솜씨로 여겨진다. 폭마다 무늬의 형태와 배치뿐만 아니라 어느 실로 수를 놓을지도 미리 정해 두었다. 이 꼼꼼한 밑그림처럼 길상은 문화 안에서 의미와 표현을 공유하며 만들어지는 패턴이다. 그러므로 길상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꿈꾸고 바라던 행복의 모양이 보이기도 한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수본과 실제 자수 병풍을 대조해 보면 조금씩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꽃잎의 주름이나 화기무늬 등 가느다란 붓으로는 그릴 수 있지만 자수로는 표현하기 까다로운 세부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 고쳐 표현한 것이다. 나직나직하게 펼쳐진 비단 병풍에 수놓은 한시는 궁중 연회에서 정재무(呈才舞 대궐 안의 잔치 때 공연하던 춤을 통틀어 이르는 말)를 추며 부르던 노랫말이다. 병풍 마지막 폭에 적힌 가사는 다음과 같다.

"길상여의 복록무강. 늘 뜻대로 상서롭고 복록은 끝이 없으리."

줄지어 놓인 알록달록한 꽃 사이로 펼쳐지는 태평성대의 기원을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 읽다 보면 길상이란 어디서 툭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먼저 밑그림 같은 뜻을 마음에 품고, 그 뒤에 차근차근 시간 속에서 힘껏 이루어 가는 것이 길상이 가리키는 행복일지 모른다. 길상여의 복록무강. 이번 새해엔 작은 목소리로 이 큰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 신지은(문화재칼럼니스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은혜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