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

장군묘는 잘 관리되고 있다. 김좌진 장군의 묘는 보령에 있지만 생가는 홍성에 있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 김좌진 장군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장군은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은 이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을 때 분노하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1905년 호서지방을 널리 밝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호명학교는 장군에 의해 1907년 현재 갈산중·고등학교 부지에 설립된 홍성지역의 대표적인 사립학교로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장군은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가택을 학교의 공간으로 제공하는 등 애국 계몽정신을 가르치고자 교육에 힘써왔다는 역사적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1908년 황성신문, 1925년 발행된 홍성군지와 1969년 발행된 홍양사 등의 기록에 근거해 현 갈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갈산공립보통학교가 호명학교의 교사를 가교사로 쓰게 되며 1917년 개교한 것으로 고증됐다. 1913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호명학교 자리에 설립된 갈산공립보통학교 제1회 졸업기념사진. 뒤의 건물이 호명학교.

                                 (출처갈산초등학교 100년사, 갈산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청산리대첩 승전기념사진(출처 홍성군지)

1917년 김좌진 장군이 자신의 재산을 다 정리하고 넘어가 북만주에 터를 잡고 대한광복단에 가입한 이후 김규식, 나중소, 이범석 등과 함께 군대를 개편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는데,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작전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온 일본군을 백운평 숲속에서 매복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동해 천수평(泉水坪)에 주둔한 일본군에 승리한 이후에 홍범도 부대와 함께 연합전선을 편 것으로, 만 4일동안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둔 것이 청산리 대첩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던 장군은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했다. 암살 직후 만주땅에 묻혔다가 아내 오숙근 여사가 1940년 장군의 유해를 밀감 상자로 위장해 비밀리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57년 부인이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현 위치에 합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馬)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장군묘는 잘 관리되고 있다. 김좌진 장군의 묘는 보령에 있지만 생가는 홍성에 있다.




                              독립운동가인 백야(白冶)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소이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