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충청수영성 保寧忠淸水營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보령 오천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8월 24일 ‘보령 충청수영성’으로 명칭을 바꾸어 사적 제50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忠淸水營城
해유시화첩(조선시대 고서)에 나와있는 영보정과 거북선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보령 오천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8월 24일 ‘보령 충청수영성’으로 명칭을 바꾸어 사적 제50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2만 5,326㎡이며,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의 성으로 1510년(중종 5)에 축조하였는데,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돌로 높이 쌓아 올린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종 4년(1509)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축성,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城)으로 자라(鱉)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사방(四方)에 4대 성문(城門)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최근에 복원한 영보정과, 서문 망화문(望華門)이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보기드문 아치형으로 건립하여 조선 시대의 석조기술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아치 망화문 계단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고 한다. 영보정(永保亭)은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지은 우리나라 최고의 정자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와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정약용과 이항복, 송시열은 영보정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해유시화첩에는 영보정과 수영성에 정박해있는 거북선 모습이 그려져 있어 거북선의 역사가 학계에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다. 건물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역주민이 이곳에 살았다 전해지고 있는 고려 때 빈민 구제기관인 진휼청(賑恤廳)이 있으며,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 해유시화첩은 규남 하백원이 1842년에 그린 기행화첩이다. 규남은 1842년 충남 보령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 머무르던 1842년 4월 15일 보령의 다섯 선비들과 함께 보령 앞바다를 유람하고 그 기행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 여섯본을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그림은 3폭으로 송호와 황학루 영보정을 지도식 실경산수로 그리고 있다. 17세기 이후 유학의 전통 아래 지속되었던 조선 문인들의 기행문학과 기행사경이 19세기 초 지방 문인들에게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오천항(鰲川港)은 백제 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 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軍船)을 두었으며, 세조 12년(1466년) 수영(水營)을 설치, 충청 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다. 충청수영성은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보령방조제로 막혀 못 가지만 옛날에는 광천까지 다녔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 세곡을 실어나르는 배)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 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 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 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 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최근엔 KBS방송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영보전과 오천항 


                                                                                         망화문


                                                                 진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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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