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출신의 독립운동가 현계옥

의열단 최초 여성 단원,

기생 출신의 독립운동가 현계옥

의열단 최초 여성단원 

여기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현계옥.

대구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 때 대구기생 조합에 들어가 춤과 가야금으로 유명한 기생이 되었고, 곧이어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 조합, 한남 권번으로 진출한 그녀는 승마술까지 익혔고, 신문에도 날만큼 소문난 인물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어느 날, 현계옥은 경성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1918.3.5 승마복 차림의 현계옥(오른쪽). 1918년 3월5일치 <매일신보> 보도. 가운데는 기생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인 정칠성.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디지털컬렉션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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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 독립운동가들이 한데 모였다. 모두가 좀 더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일제를 공격할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항일 무력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이때 조직된 이 단체의 이름이 바로 의열단이다. 단장 김원봉을 중심으로 모인 의열단의 독립지사들은 일본 고관을 암살하거나 주요 관공서를 폭파하는 등의 치밀하고 작전을 수행해갔다.

1919년 어느 날, 당대의 최고 기생 중 한 사람이었던 현계옥은 경성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한동안 당시 연인이었던 현정건의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던 현계옥은 일본에 더 크고 치명적인 영향을 줄 독립운동을 꿈꾼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그 의열단에 찾아가 여성으로서 최초로 가입한 단원이 된다.

의열단에 들어간 현계옥은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을 제조하는 기술과 육혈포(당시 권총) 사용 방법 등을 배웠다. 폭탄 제조 및 저격 훈련과 더불어, 특히 외국어를 학습하여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여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하기 위한 준비를 만반에 갖추어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폭탄을 운반하는 등, 목숨을 건 비밀공작 활동을 수행하였다. 여느 남성 단원에 뒤지지 않는 능력과 재치로, 의열단의 중요한 톱니바퀴가 되었다.




















                                                                   현계옥(좌측) 정칠성(우측)











                    2016년에 개봉했던 영화 <밀정>에서 한지민이 연기한 여성 의열단원으로 등장한 '연계순'이라는 인물이

                    현계옥을 모델로 설정되었다.



또한 현계옥은 변장술에도 굉장히 능한 인물이었다. 폭탄 등을 옮기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나는 임무 중에는, 여성이라는 점이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유용할 때도 많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천진에서 상해로 폭탄을 옮기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날이었다. 일본 경찰을 따돌릴 방안을 고민하던 현계옥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린다. 바로 남장을 통해 자신을 숨기는 것이었다. 남성으로 위장하여 상황을 무탈히 넘기고 임무를 완수해낸 그녀의 업적은 당대의 신문에도 기고된 바가 있다.

보이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의 각오를 버리지 않고 묵묵히 독립지사로 임무를 수행했던 현계옥. 안타깝게도 그녀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정건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 그녀는 1928년 시베리아로 망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공산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만이 그녀에 대한 공식적인 마지막 기록이다.

또한 최초의 여성 의열단원으로서 충분히 여러 임무를 수행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현계옥은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녀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기리지 못하는 데에는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지만, 한 가지 더 세간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이유에는 그녀의 출신에 대한 편견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기생 출신이라는 딱지는 그녀가 의열단에 가입하려고 했을 당시에도 이겨내기 힘든 차별로 작용했다. 끈질긴 설득 후에야 의열단원으로 받아들여진 그녀였다.

더불어 기존의 현계옥에 대한 설명은 그녀가 현정건(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의 형)과 연인이었던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러한 설명은 그녀가 중국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것이, 마치 사랑하는 이와 떠나기 위한 결심이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이러한 시각이 한참이나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일화가 있다. 현계옥이 현정건을 만나기 위해 경성의 한남 권번으로 이사까지 했지만, 이런 그녀를 두고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가버린 남자였다. 그런 현정건이 현계옥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다음 해 그가 독립자금을 모으려고 서울로 잠시 돌아온 때였다. 그때 마주친 현계옥은 현정건이 여태 알고 있던 현계옥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현정건에 대한 정과 별개로, 그녀만의 독립운동의 뜻을 결심한 상태였던 현계옥이었다. 당시 현계옥은 현정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애인으로 혹은 한 여자로만 보지 말고 같은 동지로 생각해 달라”

이 한마디만으로도 우리는 현계옥의 굳건한 다짐을 느낄 수 있다. 당당히 독립된 주체로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말이다. 그녀의 결심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것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들의 홍일점이 되어 여성의 일을 도맡겠다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나라를 빼앗긴 국민 중에서도, 기생이라는 가장 낮은 신분으로 피할 수 없는 온갖 설움과 혹한을 경험한 후, 스스로 나서서 시대를 바꾸겠다는 생각에 눈뜬 한 인간의 결심이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각오가 있었다. 연인이 있었다는 이유로 왜곡할 수 없는 한 여성만의 독자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현계옥은 역사의 그림자에서 조력자의 위치로만 있기에는 아주 강력하고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의열단의 두 발로 대단히 활약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는 후손 여성들에게 한 인간이 가져야 할 굳센 의지와 자세를 가르쳐준다. 현계옥에 독립을 이끈 운동가로서의 칭호를 붙이는 것은 충분히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현계옥이라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보는 것 역시 충분히 필요한 일이다.


2019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가 서훈한 독립유공자는 15,511명이라고 한다. 이 중 여성 독립유공자는 432명, 대략 2~3%에 불과하다. 여성 독립유공자의 수를 늘리기 위하여, 독립유공자 기준을 완화하고 또 더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여성의 일과 능력에 대한 편견을 지우는 것,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더 넓고 깊게 파고들어 아는 것 역시 그들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남기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현재와 미래의 여성의 업적을 충분히 합당하게 기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과거의 여성들의 업적도 가려지지 않게 계속 발굴해내는 일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현계옥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여성 독립운동사가 써질 수 있기를 바란다.  기사 참고/ 1. 영남일보, [여성칼럼] ‘밀정’의 여주인공 연계순과 현계옥, 2. 매일신문, [3·1 운동 100주년 다시 일어나는 대구경북] 중-"조선의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가 아닌 독립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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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