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상징 경주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은 코로나19의 어려운 이 시기에 지혜와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역사 여행지다. 단순 볼거리와 먹거리보다 바다에서 솟은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여행지라 할 수 있겠다.

호국의 상징 경주 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1967.07.24 지정)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불린다. 봉길리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다.

문무대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武烈王)의 업적을 이어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계림도호부를 설치하려는 당나라 군대를 격퇴하여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뛰어난 군주다.

이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은 재위 21년인 681년 임종을 앞두고 맏아들과 신하들을 부른 자리에서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동해바다에 묻으라고 했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노라는 유언을 남겼다. 왜구의 침입이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얼마나 집요하게 계속된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해 7월 문무대왕은 서거했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이곳에서 장사를 지냈다.



문무대왕릉은 토함산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오는 대종천과 이곳 봉길리 바다가 만나는 지점 이곳에 홀로 떠 있는 조그만 바위섬이다. 바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30대 문무왕 (661-681)의 수중릉이다.

둘레 200m의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을 깎은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여서 항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깊이 3.6m, 폭 2.85m, 두께 0.9m의 판석(板石)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어떤 장치를 해서 모신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문무대왕릉은 동서남북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水路)를 만든 것처럼 되어 있다. 동쪽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의하여 수로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 수면은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수중 발굴이 되지 않아 이 돌 밑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수로와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으로 보아서는, 기록에 있는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는 것이다. 안쪽에 마련된 공간의 동서남북으로 수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끔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 석탑 기단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동서남북으로 수로를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

화장하여 재를 뿌렸느냐(산골처), 유골을 직접 모셔 놓았느냐(장골처)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 간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장골처라면 문무왕의 무덤이 세계 유일한 바닷속 왕릉이 되겠지만, 산골처라면 그 의미는 퇴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문무왕은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에 호국용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문무왕이 왜(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동해안 쪽에 감은사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海龍)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왕이 죽자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문무왕은 이런 유언을 남긴다.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면 죽은 이의 넋을 구원하지 못한다. (…) 내가 죽고 열흘이 지나면 창고 문 앞 바깥마당에서 불교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은 정해진 규정을 따르되 내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세금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무덤을 크게 만드느라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지 말고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라고 한다. 검소와 절약을 강조하며, 백성들의 세금을 줄이는 등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 전쟁으로 괴로워했던 백성들을 달래고, 새 시대를 열고자 한 문무왕의 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와 통일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요즘 시대에 맞는 말이다. 전쟁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이때, 문무왕의 유언을 절대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고 한 바램도 사실은 힘들게 이룩한 평화통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전쟁을 위한 호국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호국이 아닐련지.

이곳 경주 감포 해변에는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3곳의 유적지가 있다. 이견대, 감은사지, 그리고 이곳 문무대왕릉이다. 다음 회에 이견대(利見臺)와 감은사지(感恩寺址)를 자세하게 연재하겠다.

이곳 대왕암은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대왕암 위로 솟아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이곳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대왕암 주변으로 모터보트가 물살을 가르기도 하고,  해수욕하는 사람들로 붐비며, 방생 법회와 용왕제, 무속인들의 굿 등 종교적인 행사도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기자가 이곳을 촬영할 때도 많은 무속인들의 행사가 해안 곳곳에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며 진행되고 있었다.

문무대왕릉은 코로나19의 어려운 이 시기에 지혜와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역사 여행지다. 단순 볼거리와 먹거리보다 바다에서 솟은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여행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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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