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천전리 각석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뿐만 아니라 고대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적이다.

울주 천전리 각석
대곡리 암각화에서 대곡천을 따라 북쪽인 상류로 가면 국보 제 147호로 지정된 천전리 각석이 있다.

반구대 지역에 있었던 반고사라는 절터를 조사하던 중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였다. 1970년 12월 24일 동국대학교 박물관 불적조사단은 경주를 출발했다. 한국일보 경주주재 기자는 보안부대의 협조를 받아 지프차로 함께 이동하였다. 지금도 도로 사정이 좋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문명대교수는 바위면을 확인하고는 "最古의 화랑유적"이라고 환호를 외쳤다. 엄청난 발견이었다.



1971년 1월 1일자 한국일보는 특종으로 1면을 장식했다. 당시에 원고는 유선전화로 보냈는데 문화재 용어가 어려워 한국일보사장이 직접 받았다고 한다. 1면에는 당연히 대통령 신년사가 톱기사인 것은 정해 놓은 것인데 일개 문화재기사가 건방지게 그 자리를 밀어냈다. "울주 언양면 반구동 산골" "1400년 풍적을 견뎌온 벽화와 명문"이라고 대서특필이 되었다. 당시에는 신라 화랑의 흔적으로만 해석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곧 이 특종기사를 보고 심기가 심히 불편했다. 그래서 이미 지방판은 그대로 나갔지만, 서울판은 수정이 되어 대통령 신년사가 먼저였다. 이것이 바로 야사였던가. 우병익기자는 그때 이야기가 나오면 빙그레 웃을뿐이다. 그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하는 표정이다.

물이 찰랑대는 옆인데 윗부분이 15도가량 앞으로 나온 경사진 퇴적암의 암면이다. 높이는 약 2.7m 너비는 9.5m의 자연으로 형성된 평면 바위이다. 윗쪽은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인 무늬와 동물, 추상적인 인물 등이 조각되었다. 아랫쪽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으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등 다양한 내용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상단과 하단 부분의 그림을 그린 부류가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이해되며 선사시대부터 신라 시대까지의 생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령 양전리 암각화는 단일문양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천전리 각석은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문양들이 암면 전체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추상적인 도형 그림은 농경의 풍요와 다산을 비는 일종의 종교적 상징으로 해석된다.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하단에는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그어서 새긴 세선화로 되어 있다.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인물상, 돛을 단 배, 말 등이 행렬을 이루고 있으며 용 그림 등도 확인된다.


신라 시대 명문은 을사, 기미 등을 통해 6세기 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며 명문은 크게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이 을사년(525) 6월 18일 새벽에 천전리로 놀러와 새긴 것과 사부지갈문왕 부인 지몰시혜가 남편이 죽자 그리움에 사무쳐 그의 흔적이 남은 천전리 계곡으로 539년(법훙왕26) 어린 아들(훗날 진흥왕)과 함께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뿐만 아니라 고대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적이다.



천전리에는 인물, 동물, 기하하적 그림과 세선화, 명문 등 780여 개의 그림과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 제작기법은 쪼기와 갈기, 긋기, 돌려파기 등으로 대곡리 암각화와 동일하지만 금속도구를 이용해 새긴 가는 선각 그림과 문자가 있다.  행렬도는 배, 행렬의 수장, 기마 인물상과 춤추는 여인 그리고 말에서 내린 무사와 기마 인물상이 표현되어 있다. 인물 형태는 정확하게 표현하기보다는 각 대상의 옷과 얼굴, 자세 등 특징만을 표현하였다. 행렬도는 6세기 신라 사회의 귀족들이 방문한 기록으로 보아 그들의 모습을 새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윗부분의 동심원 타원형 마름모 등 기하학적  그림이 단독 또는 가로 세로 방향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기도 하며 두 겹, 세 겹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주로 해, 천둥, 비 등 자연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청동기시대 농경민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주술 의례의 결과물로 추정이 된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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