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리 반구대 일원2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의 남쪽 지류에는 대곡리 암각화가 있고 그 북쪽에는 천전리 암각화가 있다. 이 둘을 묶어서 반구대 암각화라고 부른다.

대곡리 반구대 일원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의 남쪽 지류에는 대곡리 암각화가 있고 그 북쪽에는 천전리 암각화가 있다. 이 둘을 묶어서 반구대 암각화라고 부른다.



반구대는 울산에서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산속이다.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 가히 일품인데 그 주변으로 냇물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바위는 병풍처럼 이어져 신선이 내려올 것만 같다. 태화강 상류인 대곡천은 백만 울산 시민들의 상수원이다. 그래서 그동안 문화재와 식수원을 두고 많은 갈등을 빚어왔다.

옛날에는 대곡리 암각화를 바로 앞에서 쳐다보곤 했는데 지금은 물 건너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나마 수몰될뻔 했는데 그렇게라도 볼 수 있음이 다행이다. 대곡리는 한실이라 불리며 순우리말로는 한골이다. 한골은 큰 골짜기 또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이며, 원래 대곡리의 본동이었으나 사연댐 축조로 수몰되어 반구리로 옮겨졌다.

일찍부터 우리나라도 구곡문화를 향유하는 풍조를 이루었다. 구곡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면서 유학자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울산의 태화강 상류인 대곡천 유역에는 3개의 구곡이 있음이 밝혀졌다. 현재 대곡댐이 중심 지역인 도와 최남복(1759~1814년)의 백련구곡과 사연댐이 중심 지역인 천사 송찬규(1838~1920년)의 반계구곡 그리고 주인공과 그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또 하나의 구곡이 그것이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에 와서 태화강 상류 지역에도 성리학 문화인 구곡이 존재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반계구곡은 "반계구곡음" 시로 전하고 백련구곡은 중심인 5곡에 위치한 "백련서사"와 "백련구곡도가", "백련구곡도"로 남아있다. 빼어난 자연풍광에 형성된 구곡원림은 단순히 아홉 구비의 공간만이 아니라 성리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을 드러낸 이상향이었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1337~1393년)는 1375년(우왕 1년)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정책에 반대하다가 언양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는 반구대를 찾아 시름을 달랬다고 하며, 이때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반구대는 포은대라고 불렸으며 포은은 울산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수많은 관리나 선비들이 찾아와서 시를 지었다 반구대 북쪽면의 바위에는 "반구"라는 글씨와 학 그림 등이 있는데, 이것은 집청전을 지은 최신기(1673~1737년)가 새겼다고 한다.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반구대를 찾은 적이 있고, 한강 정구(1543~1620년)는 반구대 부근에 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언양의 유학자들은 포은, 회재, 한강을 추앙하여, 1712년(숙종38) 반구대에 반고서원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반고서원은 반구서원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고종 8년(187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 포은대실록비, 반고서원유허비를 차례로 세웠다. 반구대는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경치를 감상하고 문학을 꽃피우던 명소였다. 겸재 정선(1676~1759년)은 경상도 하양현감과 청하현감을 지내던 시기에 이곳을 다녀간 후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보인다.


천전리 각석을 보면535년(법흥왕22) 거지벌촌(언양)에 승려와 불교룰 신앙하는 식자층이 있었움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는 여러 사찰이 창건되었다. 대곡천 유역에서는 원효가 7세기 중엽에 반고사에 머물며 저술 활동을 했다. 8세기 대에는 장천사와 백련사가 건립이 되었다. 언양지역에는 자장과 관련이 있는 압유사가 있었으며 간월산 북쪽 기슭에는 간월사가 창건되었다. 가지산에는 신라 말에 석남사가 건립이 되었다. 이 사찰들은 대체로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다. 언양현 호적대장에는 언양현의 대표 사찰이었던 석남사와 간월사 연고사에 소속된 승려들의 호적이 수록되어 있다. 반고사의 위치는 천전리와 대곡리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대곡리에서는 석조불상과 탑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문화재는 그 자리에 있어야 빛나는데 아쉬운 부분이다. 장천사는 조선 후기 "영남 5경"의 화첩에 나타난다.

대곡리 암각화 가는 길 바위 벼랑 아래에는 훼손이 심한 명문이 남아 있다." 순치 12년(1655년) 을미 2월 18일 연로 개수공사의 시주는 •今, ••, 金••, •命卜이다.  화주는 ••이고 석수는 方北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길이 연로였다는 것과 더불어 1655년 이전에 이미 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쥰다. 연로(硯路)는 벼룻길이라는 뜻으로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루에서 음차한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 등의 의미로 해석될수 있다.


바위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제 285호로 지정되었다. 1971년 2월25일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다가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대곡리 암각화를 발견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여 물이 흐르고 바위 절벽에 암각화가 새겨진 주변은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너비 약 8m, 높이 약 4m의 수직 절벽에는 약 300여 종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고래, 거북, 호랑이, 표범, 사슴, 사람, 상어, 멧돼지, 늑대, 물개, 배 등 다양한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 고래 그림이 대표적이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고래, 새끼를 등에 업은 귀신고래, 물 위로 뛰어오르는 혹등고래 등 고래의 종류까지 알 수 있게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고래들을 사냥하고 해체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어 선사시대 해양 어로 문화를 알 수 있는 독보적인 유산이다.

암면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3~11월 오후 3~5시 사이 암면에 햇빛이 들어오면 그림이 더욱 입체적으로 잘 보인다.
대곡리 암각화에는 고래사냥 과정 중 고래를 면밀히 관찰하는 탐색의 결과로 고래 종과 습성 등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고래의 종류는 분지형태, 머리와 입의 모양, 몸통의 형태, 가슴지느러미와 꼬리 등의 특징을 통해 구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알수 있는 고래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향고래, 들쇠고래, 범고래, 삼괭이로 최소 7종류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 고래사냥을 했다는 울산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지금은 공업도시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뿌리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3차 산업이 저물어 가고 새롭게 일어서는 것이 문화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울산은 많은 것을 새롭게 얻었고 그중에서도 반구대 암각화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모두가 힘을 모아 문화유산이 더욱 빛나기를 바란다.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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