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暗行御史

암행어사 暗行御史

요즘 TV에 암행어사가 유행이다. 또 지나간 선거에서는 부정, 탈법선거 단속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선거판 암행어사인 비공개 선거부정감시단이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상대를 기죽이는 위엄 넘치는 관복 대신 남루한 차림으로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는 친근한 인상의 이웃 아저씨 같은 조선의 암행어사는 부패 관리를 처벌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해 파견된 정의의 사도로 각인되어 있다. 오늘 설화나 소설 속의 암행어사와 잠시 거리를 둔 진짜 역사 속 암행어사 이야기를 소개 한다.

그런데 마패와 함께 암행어사가 유척(輸尺)을 들고 다녔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를 말하는데, 암행어사에게는 대개 두 개의 유척을 지급했다고 한다. 하나는 죄인을 매질하는 태(答)나 장(杖)등의 형구 크기를 법전 규정대로 준수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량형을 통일해서 세금 징수를 고르게 하는데 쓰고자 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형구를 잴 때, 토지 측량할 때, 가정에서 의복을 제조할 때 등 각각의 용도에 쓰이는 자의 규격에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암행어사는 필요한 용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자를 가지고 다녔다.

한편 암행어사는 국왕으로부터 봉서(封書)와 사목(事目)을 받았다. 봉서는 일종의 어사 임명장과 같은 것으로 암행어사의 임명 취지, 감찰 대상 지역의 명칭, 임무에 대한 사항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사목은 어사의 직무상의 준수 규칙과 염찰 목적 등이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봉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마패와 유척, 봉서와 사목 등은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필수로 지녔던 것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어 우리들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활약상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옹정 원년명 마패 가로94cm 세로11cm 두깨0.7cm이며 마패 틈새에 인주의 잔여물로 추측되는

붉은색 물질이 끼워있다.



문경 옛길 박물관의 오마패


철도 박물관 십마패


중앙박물관


조세박물관 


성암 고서박물관 소장 마패

 


암행어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의 측근의 당하(堂下 : 정3품 하계 통훈대부 이하) 관원을 지방군현에 비밀리에 파견해 위장된 복장으로 암행하게 한 왕의 특명사신으로 이들을 비밀리에 보내면서 수령의 득실(得失 : 훌륭한 정치와 탐학한 정치)과 백성의 질고(疾苦 : 고통이나 어려움)를 탐문해 돌아와서 임금에게 사실대로 아뢰는 것을 직무로 하였다. 수의(繡衣) 또는 직지(直指)라고도 하는데, 중국 한나라의 고사에서 기원한 용어이다. 그러나 암행어사는 조선의 독특한 제도였다.

암행어사가 일반어사와 다른 점은 일반어사는 이조(吏曹)에서 임명하고 그 거동이 공개적인 것에 비해, 암행어사는 왕이 친히 임명할 뿐 아니라 그 임명과 행동을 비밀에 부친 점에서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부터 분대어사·행대·찰방·문민질고경차관 등 중앙에서 파견하는 감찰관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 암행감찰은 국왕과 신하 사이의 의를 깨치는 행위라 하여 금기시했다. 뿐만 아니라 추첨적간(국왕이 임의로 제비를 뽑아 감찰관을 파견할 지역을 정하는 것)이나 감찰관이 여염에 들어가 직접 민폐를 묻는 행위는 물론이고, 중앙에서 감찰관을 파견하는 자체도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다.

대신들은 감찰의 경우 왕이 한 도 행정의 전권을 위임한 관찰사가 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방관의 부패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성종 때부터 어사의 불시 파견이나 암행감찰이 용인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들어 지방수령과 무장의 자질이 떨어지고 이들의 비리문제가 계속 커지자 마침내 암행어사가 제도화되었다.

암행어사라는 명칭은 1509년(중종 4) 11월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성종 말기에서 이 사이에 공식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점차 제도로 자리를 잡아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는 반드시 암행어사는 비밀리에 임명하여 미행해야만 감찰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암행어사가 더욱 활성화하여 숙종에서 정조 때를 거치면서 임명방식·임무규정·운영방안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결과 후기에 어사는 으레 암행어사를 지칭할 정도가 되었다.

암행어사는 보통 당하관(堂下官)으로 젊은 시종신(侍從臣:대간·언관·청요직 등을 말함) 중에서 뽑았는데, 왕이 직접 임명하거나 의정부에서 왕의 명령을 받고 후보자를 선정하여 천거하면 왕이 그중에서 선정하여 임명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왕이 승정원을 통해 어사임명자를 불러서 직접 임무와 목적지를 알려주고 봉서·사목(事目)·마패·유척(鍮尺)을 주거나, 직접 면담하지 않을 때는 승지를 통해 봉서와 마패 등을 전달했다.

이때 대상으로 하는 고을은 왕이 제비를 뽑아 결정할 때가 많았다. 임명된 어사는 당일로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봉서는 어사의 임명장으로 어사의 임무도 함께 적었다. 겉면에 어사의 이름을 쓰지 않고 '동대문 밖에 나가서 열어볼 것'과 같은 문구만 적었다. 어사는 개봉하여 임무를 확인하고 목적지로 출발했다. 나중에는 별도로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事目)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에서 어사의 임무를 일괄로 규정했는데, 이를 〈암행어사재거사목 暗行御史齎去事目〉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거사목〉의 내용이 너무 많고 번거로와 사목이 일반화된 후에도 왕이 직접 봉서에 지역별로 중점적인 탐문사항이나 추가사항을 적은 사목을 별도로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패는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패로 원래는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주었다.

그런데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암행어사는 역마를 이용할 필요가 없으므로 마패는 어사의 신분증과 같은 것이 되었다. 창고를 봉인할 때는 어사의 인(印)으로 대용하기도 했다. 마패는 병조에서 발급하지만 비밀유지를 위해 암행어사의 것은 병조를 통해 정식 발급 절차를 밟지 않고 승정원에서 보관했다가 내주었다.

마패는 1마패에서 5마패까지 있는데, 암행어사에게는 보통 2마패를 주었다. 유척은 국초부터 중요한 감찰사목이었던 각 고을의 도량형과 형구의 규격 검사를 위해 지급하는 것으로 2개를 주었다. 처음에 비용은 암행어사가 자급했는데, 후기에는 정부에서 일정하게 지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행은 중앙 각사의 서리(書吏)나 역졸(驛卒)을 어사가 직접 골라 몇 명씩 대동하는 것이 관례였다. 군관을 차정해 가는 것은 금지했는데, 실제로는 우수한 무사의 필요성에서 이들을 선발해 가는 사례가 꽤 있었던 것 같다.

초기의 암행어사는 명령받은 고을만 감찰할 뿐 지나가는 읍의 불법은 보고할 수 없었으며, 임무도 전통적인 감찰사목인 형정·부세불균·군기점검·도량형·금령준수 등 수령의 업무수행 상황, 수령·향리·토호의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이같은 방식은 숙종 때를 계기로 크게 바뀐다.

1681년(숙종 7)에 암행어사의 임무를 새로 규정했는데, 어사가 고과 공정 등 관찰사의 업무수행까지 감찰하며, 지금까지 수령의 임무였던 문무의 인재나 효행이 탁월한 자, 환과고독이나 100세 이상인 자, 또는 패상자나 백성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 및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를 적발하여 보고하는 일을 어사가 직접 행하게 했다. 정조 때에는 어사가 지나가는 고을의 불법사도 염찰·보고하게 했으며, 부세관계 규정이 많아졌다. 이로써 어사는 수령비리 적발의 차원을 넘어서 읍폐 전반을 직접 처리하는 사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어사의 임무수행 방식은 출도와 복명으로 나뉜다.

출도는 어사가 직접 관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통 역졸이 마패로 문을 두드리며 '어사출도'를 외쳤다고 한다. 출도는 관아로 하는 경우도 있고, 성문이나 누에서 하기도 하는데, 출도의 시기·방법·복장은 어사의 편의에 따르도록 했다. 출도한 어사는 백성의 진정을 수리하고, 장부와 창고를 검열하여 부정이 분명히 드러나면 창고를 봉인하거나 수령을 처벌했다. 이때 어사가 먼저 직권으로 파면하고 왕에게 계문하기도 하고, 어사의 보고를 받고 추고하여 처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사의 역할은 출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출도는 지정된 고을에서만 할 수 있는데, 반드시 출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잠행순찰만 할 수도 있었다.

복명은 어사가 사명을 바치고 돌아와 보고서를 바치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서계와 별단이 있다. 서계는 조목별로 지정받은 임무에 대한 수행결과인 사찰결과를 적고 자신이 탐문한 감사·수령·만호·진장 들의 치적을 적었다. 별단은 어사가 본 각읍의 폐단과 민폐를 총괄적으로 보고하고 자신의 견문과 교양을 동원하여 개선책까지 개진하는 것으로 시무책과 같은 것이다.

숙종 때까지는 서계가 중시되었으나 어사의 역할이 변함에 따라 영조·정조 때에는 별단의 비중이 높아졌다. 별단은 어사의 인물을 평가하는 자료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암행어사 박문수


유척(조선시대 놋쇠로 만든 자)  파견된 암행어사들은 유척을 지니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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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