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길’ 탐방코스

켜켜이 쌓여 온 시간으로 만들어진 길 위에는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번영과 위기의 순간이 중첩되어 있다.

‘왕가의 길’ 탐방코스

문화유산 방문캠페인.‘왕가의 길’, 서울, 광주, 수원, 화성, 김포, 강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서울. 조선시대 이후로 현재까지 수도로 존재해 온 이곳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압축된 곳으로, 근현대 역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궁궐이 다섯 개나 있다 보니 왕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유적과 유물로 남아 있는 풍성한 이야기는 수원과 화성, 김포와 강화로 확장된다.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길은 도성 안과 밖을 연결하는 길이다. 켜켜이 쌓여 온 시간으로 만들어진 길 위에는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번영과 위기의 순간이 중첩되어 있다.


1코스 창덕궁, 종묘, 남한산성, 수원 화성, 융릉과 건릉.


1 창덕궁 조선의 별궁.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복궁 건물이 일직선상에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반면에 창덕궁은 자연지형에 맞춰 자유롭게 지어졌다. 특히 왕실의 정원인 후원은 인공적인 건축물마저 숲의 일부로 보일 만큼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와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2 종묘 

조선의 왕과 왕비,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에 뿌리를 둔 조선왕조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왕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종묘를 가장 먼저 지었다. 이는 종묘가 국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보여 주는 신성한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3 남한산성

패배의 역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남한산성 자체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지어진 성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동·서·남문루와 방어시설, 군사훈련시설, 관청 등이 남아 있다. 정무시설뿐만 아니라 종묘사직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까지 있어, 남한산성이 유사시 임시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4 수원 화성

정조의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설계와 문신 채제공의 감독으로 축성된 수원 화성은 거주지 기능과 방어 기능, 상업 기능이 합쳐진 성곽도시였다. 동서양의 과학기술과 건축술이 총동원된 이 계획도시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5 화성 융릉과 건릉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개칭한 뒤 배봉산 기슭에 있던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했다. 그 당시 현륭원으로 불렸지만, 1899년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어 융릉으로 승격됐다. 조선 최고 명당에 조성된 융릉은 추존왕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장중하고 화려하다. 융릉 서쪽 울창한 숲길 너머로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2코스 강화 고인돌 유적, 전등사, 김포 장릉, 경복궁, 종묘


6 경복궁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던 경복궁은 고종 때인 1867년 다시 세워졌다. 중건된 경복궁은 처음 지어졌을 때보다도 규모가 훨씬 컸다. 그러나 주요 건물을 제외하고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철거당했다. 현재는 복원 사업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비록 많은 건물이 없어지긴 했으나 처음 지어진 자리에 있는 법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7 김포 장릉

김포 장릉은 추존왕인 원종(인조의 아버지)이 묻힌 곳이다. 장릉산 자락에 자리한 김포 장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추존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라 봉분 아랫부분에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8 전등사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련된 장소가 있다. 하나는 마니산이고 다른 하나는 삼랑성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의 외곽 방어 기능을 담당했다. 전등사는 바로 그 삼람성 안에 위치해 있다. 원래 이름은 진종사였으나 고려 때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 의 전등사로 바뀌었다.


9 강화 고인돌 유적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전체 높이가 2.6m, 덮개돌의 길이가 6.5m에 이르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2개의 대형 고임돌 위에 얹혀 있는 덮개돌의 무게는 무려 50톤에 달한다.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는 부근리 지석묘는 선사시대의 기술, 사회, 정신세계 등을 엿볼 수 있어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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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