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씻는 삶에 관하여

전신을 씻는 일은 쉽지 않아서, 전신욕이 연례행사였다는 것은 농담이 아닌 사실이었다.

잘 씻는 삶에 관하여

한동안 화장실 다녀오면 손을 씻네 마네로 논란이 일었던 때가 있다. 지금은 아무도 손을 씻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뭐든 잘 씻는 게 감염병 예방의 첫 단계라는 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수세기 전, 위생 환경이 좋지 못했을 때는 어땠을까? 그때도 ‘잘 씻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다를 게 없었다.

01.조두박. 조두는 팥을 맷돌에 갈아 껍질을 벗겨낸 뒤 간 것이다. 팥 외에는 녹두와 콩으로도 만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씻고 살았을까? 조선시대에 동네마다 목욕탕이, 집마다 샤워 시설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우리 조상들은 주로 부분욕을 했다. 손, 발, 얼굴, 이 등을 그때그때 적절히 씻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한 후의 뒷물이나 머리 감기 등은 필요에 따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신을 씻는 일은 쉽지 않아서, 전신욕이 연례행사였다는 것은 농담이 아닌 사실이었다.



조선, 비누의 탄생
유교적 질서는 몸가짐을 중시했다. 몸가짐을 통해 마음이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아침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낯 씻기였다. 물론 일반 백성들의 경우는 그냥 물을 묻히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사는 것이 넉넉한 집안의 여인들은 얼굴을 씻는 일에 좀 더 정성을 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쌀뜨물이나 쌀겨, 녹두, 콩, 팥을 가루로 만들어 물과 섞어서 얼굴을 닦기도 했다. 특히 녹두 가루는 물과 섞어 문지르면 미세한 거품이 나는 성질이 있어 미백과 청결에 도움이 됐다. 당시로서는 주목받는 미용품인 셈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이처럼 씻기 위해 사용하는 곡물가루를 ‘조두박’에 담아 썼다. 그 때문에 이 곡물가루를 ‘콩 팥의 가루로 씻는다’는 의미를 중의적으로 붙여 ‘조두( 豆)’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더러움을 날려 보낸다’ 는 뜻에서 ‘비루(飛陋)’라고 불렀다.

‘비루’라는 명칭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켜 ‘비노’로 불리다가 오늘날 ‘비누’라는 단어로 정착되었다. 어원은 한자지만 세월의 힘이 더해지며 변화를 일으킨 순우리말이다.

02.국보 제135호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중 <단오풍정>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청
03. 양지(버드나무 가지) 버드나무 가지는 칫솔처럼 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 각국에 비슷한 방식의 도구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셔터스톡


이 닦기와 머리 감기 뭐가 더 견딜 만했을까

이 닦기는 흔히 양치라고 부르는데, 많은 사람이 ‘치’라는 한자가 음식을 씹을 때 사용하는 ‘이’를 의미하는 한자인‘齒(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양치’라는 말 옆에 한자표기로‘楊枝(양지)’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양지(楊枝)’라는 한자말을 풀어보면 ‘버드나무 가지’이다.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이를 청소하고 관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2 연산군 당시의 기록을 보면 “양치질하는 나무를 만들어 바치게 하라”라는 대목이 나오고3, 조선시대 왕명으로 만든 어휘사전인 『역어유해』4에는 양치질을 ‘양지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오늘날 이쑤시개처럼 버드나무 가지로 이 사이에 낀 음식 찌꺼기를 제거하기도 하고 섬유질이 많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이 표면을 긁어 이물질을 제거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난 후 물로 헹구어 냈기 때문에 ‘양지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추측한다. 『동의보감』에도 “소금으로 이를 닦고 더운물로 헹구면”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도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머리는 그리 자주 감는 것이 아니었다. 깨끗한 물에 머리를 골고루 적셔 감고 빗질을 촘촘하게 해서 틀어 올린 모양이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 일반적이었으므로 쉽게 더러워질 일도 없었고 세정제의 도움이 없어도 생각만큼 냄새가 지독하진 않았다. 염색, 펌, 헤어스타일링 등 열기구를 사용해 머리를 만지는 일이 없었던 조선시대라 모발 손상을 걱정할 일도 적었다. 미세먼지나 화학적인 헤어 제품으로 범벅이 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물로 정성 들여 감고말리고 빗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위생관리는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04. 보물 제1220호 명안공주 관련 유물 ‘백동용화조어문세수대야’ 명안공주는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3녀다. 그녀의 유물은 당대 궁중생활사 및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한국문화정보원


목욕, 정도와 외도 사이 쉽지 않은 선택
유교적인 덕목이 사람의 삶 속에 자리를 잡고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었던 조선시대에 몸을 닦는 일은 군자의 도리를 다하고 사람답게 사는 바른길[正道]임과 동시에, 옷을 벗고 살을 내보여야 하는 다소 벗어나는 행동[外道]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군자’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일반 백성들은 냇가 등 주변에 깨끗한 물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의 이목만 피한다면 쉽게 목욕을 즐길 수 있어 자유로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왕가와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의 목욕은 훨씬 더 조심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궁궐에서 일하는 궁녀나 나인들조차 전문적인 목욕 시설이 갖추어진 것은 아니어서 부엌이나 빈 창고에서 문단속하고 물을 조금씩 끼얹거나 젖은 수건을 이용해 몸 구석구석을 닦으며 목욕했다.

왕이나 왕비의 경우에는 비밀스러운 장소를 따로 만들어 목욕했는데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목욕 전용 옷을 걸치고 전신욕을 했다. 오늘날 창덕궁 연경당 별채에는 ‘북수간’ 혹은 ‘목간통’으로 불리는 목욕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목간통은 나무로 만든 둥글고 큰 대형 세숫대야나 작은 목욕통을 생각하면 된다. 지체 높은 양반들은 목욕시설인 정방이라는 작은 장소를 집안에 따로 설치해서 목욕하곤 했는데 이들 역시 유교의 영향을 받아 몸을 노출 하는 것을 꺼렸으므로 목욕을 위한 옷을 갖추어 입고 몸을 씻곤 했다.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목간통 안에 들어가 몸 전체를 담그고 목욕을 즐기는 탕목욕은 매우 지체 높은 일부 계급이나 혼례를 앞둔 규수처럼 특수한 경우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간혹 목욕물을 채운 통속에 들어가 탕목욕을 즐기는 경우라 해도 배꼽 아래 반신욕 정도의 목욕이 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조두’를 목욕할 때도 사용했는데, 곡물가루로 목욕을 하면 자연스럽게 각질이 제거되고 피부에 윤기가 도는 효과가 있었다. 일종의 스크럽(scrub)을 사용하는 것 같은 미용 효과를 보았을 것이다.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인데, 곡물가루는 정말 비싼 목욕용 소모품이었을 것이다.

05. 강원도 기념물 제73호 양양동해신묘지. 능역 입구에 있는 재실에는 목욕실을 두어 몸을 깨끗이 하고 제례를 준비하도록 했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제례에 임한다는 뜻이다. ⓒ문화재청

06. 보물 제1770호 창덕궁 연경당. 연경당 별채에는 북수간 또는 나무로 만든 둥근 욕조 목간통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물 좋은 곳 찾아 떠난 선조들
얼굴을 씻고,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목욕하고 그다음은? 우리 조상들의 씻는 문화는 ‘씻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데까지 닿았다. 바로 온천 문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조선에는 온양, 유성, 덕산, 수안보, 평산, 동래 등 31개의 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온천 이용은 신분에 따라 제한된 건 아니었다. 누구나 목욕을 즐길 수는 있었다. 다만 일반 백성에게는 역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더 자주, 더 호화롭게 내 몸에 투자하려면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일차적으로 신분이 그 여유를 갈랐다.

왕과 왕비는 몸이 좋지 않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도성에 있는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인 행궁에 머무르며 온천욕을 즐기기도 했다. 현재까지 명성을 크게 얻고 있는 충청남도 온양의 온천은 물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온양행궁을 지을 정도였다. 온양행궁 안에는 간단한 국가 정무를 볼 수 있는 정치기구가 설치될 정도였으니 규모 면에서도 제법 격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왕가에서는 온천을 건강 증진이나 질병 치료에 활용하기 위해 온천물에 약재를 넣어 함께 몸으로 흡수되도록 했다.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이 온양행궁을 애용한 것은 『실록』을 비롯해 공식적인 기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사도세자가 이곳에서 다리 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려고 이용했던 기록이 『온천일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 밖에 황해도 평산군에 있는 평산 온천도 태조 이성계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즐겨 사용한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현재는 갈 수 없으니 궁금증만 더할 뿐이다.

비누가 1790년 처음으로 대량 보급된 이후, 유럽의 평균 수명이 약 20년가량 연장되었다는 뉴스가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살려낸 것이 어떤 의약품이 아니라 ‘비누’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 대처에 최선의 방법 중 하나가 ‘비누로 깨끗하게 손 씻기’이다. 개인위생이 그만큼 중요한 시대이다. 그리고 사실 개인위생은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현대의 과학이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를 조화롭게 활용하여 잘 씻고 닦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보자. 삶의 질을 높이는, 깨끗하고 건강한 혁명을 통해 우리 일상 속에서 매일 일어나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07. <온양행궁전도> 온양행궁 영괴대에 관하여 기록한 조선 후기 문헌 『영괴대기』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01. 『박통사언해』에 한글로 ‘비노’라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머리 감게 비노 좀 주워달라’는 것이다. 이 비노가 음운 변화를 거쳐 비누가 되었다고 본다.

02. 송나라 손목의 『계림유사』에도 ‘양지(楊枝)’라는 말이 나온다.

03. “봉상시의 종 송동을 취홍원으로 차송하여 양치질하는 나무를 만들어 바치게 하라” 「연산군일기」 61권 中

04. 『역어유해』는 17세기 말 왕의 명으로 사역원에서 김경준, 신이행 등이 편찬한 중국어 어휘사전이다.

05. 사도세자는 영조 36년인 1760년 다리에 종기가 생겨 치료를 위해 10일간 온양행궁으로 행차했는데, 당시 사도세자의 온천행차와 치료 내역이 규장각에 소장 중인 『온천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반주원 (작가, 『조선시대 살아보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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