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바람 대를 이어 불다

선자장(扇子匠)은 전통 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부채는 형태상으로 자루가 달린 둥근 모양의 단선(團扇)과 접고 펼 수 있는 접선(摺扇, 접부채)으로 나눌 수 있다.

천 년의 바람 대를 이어 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扇子匠) 보유자 김동식

선자장(扇子匠)은 전통 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말한다. 우리나라 부채는 형태상으로 자루가 달린 둥근 모양의 단선(團扇)과 접고 펼 수 있는 접선(摺扇, 접부채)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접선의 한 종류인 합죽선(合竹扇)은 최고 수준의 정교함과 세련미를 갖춘 공예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바람이 불면 소년은 바깥에 나가고 싶었다. 한겨울 추위쯤은 썰매 탈 생각을 하면 견딜 만했다. 하지만 소년은 마음껏 나가 놀지 못했다. 뜻하지 않게 외가에 머물면서, 그에겐 매일 해야만 하는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접부채인 ‘합죽선’ 만드는 일을 돕는 것. 대나무를 깎고, 한지를 살에 붙이고, 작업 도구를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시절이 소년 김동식에겐 고된 시간이었지만 ‘선자장 김동식’에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부채의 고장, 전주에서 나고 배우다

석소 마을(현재 전주시 인후동)에 있던 김동식 선자장의 외가는 합죽선의 명가였다. 특히 고종황제에게 합죽선을 진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외조부 라학천의 솜씨는 당대에 비견할 사람이 없었다. 외조부 라학천, 외삼촌 라태순 명인의 작품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아직 소년이던 김동식은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거기에 타고난 재주가 있었던 걸까. 그가 깎고, 잇고, 다듬은 ‘살’을 보며 외가 어른들은“너 솜씨가 있구나”라고 평했다. 좋은 스승에게 칭찬을 받으니 더 힘이 났다. 그 나이의 소년이라면 앉아만 있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제법 잘 버텨냈다. 그렇게 김동식 선자장은 열네 살부터 합죽선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해 두해, 노력한 만큼 기술이 늘었다. 일을 잘 배웠고, 남들이 보기에는 참 쉽게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합죽선의 수준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기술을 더 가르쳐줄 사람이 없이 온전히 혼자 힘으로 합죽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선자장 보유자로 인정받기까지 그는 60여 년의 시간을 오직 합죽선 한길을 걸으며 선대가 남긴 기술을 갈고닦았다.

“처음 어른들에게 칭찬받았던 게 순수하게 기뻤어요. 그게 좋아 계속해서 만들었더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됐네요.”

01. 황칠조각윤선. 접선의 한 종류인 윤선은 펼치면 둥근 모양이 된다. 이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햇볕을 가리는 일산(日傘)으로서의 기능이 더 크다.

02.색선(붉은색). 전통부채의 틀 안에서 새로운 다양성을 추구하는 김동식 선자장은 다채로운 기법과 색채가 활용된 합죽선 작품을 만든다.



한지, 낙죽, 목조각, 칠 …공예 분야의 정수가 한자루에
합죽선은 대나무 겉대를 얇게 깎은 대껍질 두 개를 맞붙여 살을 만든다. 두 개의 겉대가 합쳐진 만큼 내구도가 높고 쥐는 맛이 좋다. 제작에 드는 품이 많고, 기간도 길며, 제작 과정에서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난도가 높은 공예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랫동안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지정되지 않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합죽선 만드는 과정을 2부 6방이라 불렀어요. 크게 보면 부채의 골격을 만들어 다듬고 장식하는 일이죠. 세부적으론 여섯 단계를 거칩니다. 지금은 그걸 모두 한 사람이 소화해야 해요. 쉽지 않죠.”

김동식 선자장은 직접 깨끗한 왕대를 고르고 알맞은 크기로 쪼개고, 쪼갠 대나무를 끓는 물에 담가 불린다. 불린 대나무는 빛이 투과되어 보일 정도로 얇게 속대를 깎아 낸다. 그 후 아교와 어교를 섞어서 만든 풀로 깎아 놓은 겉대 두 개를 붙인다. 이 과정이 바로 ‘합죽’이다. 일반적인 사십선(살이 40개인 부채)을 만들려면 양쪽 변죽(부채의 단단한 겉)을 제외하고 76조각의 대나무를 합죽해야 한다.

그렇게 대나무를 깎고 붙이다 보면 종종 손에 가시가 박힐 수밖에 없다. 김동식 장인의 손끝이 언제나 부어 있는 이유이다.“일본, 중국의 부채 기술자들이 배우겠다고 온 적이 있어요. 그런데 와서는 막상 제가 대나무 자르고 붙이는 과정을 보더니 ‘이건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러곤 그냥 돌아갔죠.”

정성스레 합죽한 이후에는 붙여 놓은 부챗살을 단단히 묶어 일주일 정도 말린다. 그 후 다듬고 낙죽을 넣고 한지를 붙이고 장식을 박아 합죽선 한 자루를 완성한다. 적게는 보름 정도 걸리는 합죽선 공정 과정은 그 자체로 우리 공예의 정수이다.

03. 전통방식에 따라 완성도를 추구하는 김동식 선자장의 합죽선 작품들은 펼쳐졌을 때 남다른 격이 느껴진다.

04. 부하기. 단시와 장시를 아교와 어교를 녹여 섞은 풀로 칠하여 붙이는 과정

05.도배. 풀칠한 부챗살에 접은 종이를 넣어 붙이는 과정



바람의 나라에서 근본 있는 명품, 합죽선
우리나라에서 부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나오는 문헌은 『삼국사기』이다. 애장왕 8년의 기록으로 “가척 5명이 채색 옷에 수놓은 부채를 들고”라고 적혀 있다. 접을 수 있는 부채, 접선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서긍의 『고려도경』이다. 서긍은 당시 고려에서 본 화탑선, 삼선, 백접선, 송선 등의 부채를 언급했는데 그중 백접선이 바로 접선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왕실록』에도 부채에 대한 기록은 계속 나온다. 태종 10년의 기록을 보면 “칠한 부채[漆扇]를 금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부채가 점차 화려해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을 지나면서부터 부채는 점차 대형화되었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영조 때에는 길이가 1척인 살을 지닌 사치스러운 부채도 유행했다. 그 당시 사대부의 풍류와 멋의 수준을 부채로 가늠할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명품’이었던 셈이다.

“부채고리에 매는 장식을 ‘선추’라고 하는데 부채의 멋을 높이는 장식이었습니다. 상아, 금, 은, 호박, 향낭 그리고 패철 등으로 장식하곤 했는데, 그 길이를 길게 하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유행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해져, 정조 18년 11월 기록에는 암행어사 서유문이 부채 만드는 일의 폐단을 임금에게 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에 ‘선자청’이라는 관청을 두어 장인들이 부채를 제작하고 이를 사신이나 관료들에게 선물했는데, 정조 대에 이르러 살 수가 많아지고 겉에 뿔을 대는 등 기교를 부린 부채가 늘어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암행어사 서유문이 이를 금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합죽’이라는 표현은 이 정조 18년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채를 사용했고, 조선 후기에는 그 미적 감각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합죽선’은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마스터피스 같은 작품이었다.


여든을 앞둔 장인에게 남은 세 가지 소원


김동식 선자장에게는 남은 생애에 세 가지 소원이 있다. 첫 번째는 작품이다. 특히 지금까지 4자루밖에 만들지 못한 50cm 이상 백접선 같은 작품 제작에 다시 한 번 도전할 계획이다. “왕대를 고르는 데만 몇 년이 걸립니다. 오십살 백접선을 만들려면 추미 길이가 50cm는 나와야 하는데 그 정도 길이가 거의 없어요. 그런 걸 만나려면 운과 때가 맞아야죠.”그래서 그는 10월부터 2월까지 담양, 구례, 순천을 돌며 직접 좋은 대나무를 찾는다. ‘작품’은 ‘대나무’일 때부터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동식 선자장의 두 번째 소원은 이수자다. 현재 그의 아들 김대성 씨가 선자장의 명맥을 이으려 기술을 배우고 있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우리 전통 기술을 알리고 남기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다. 부채에 대한 애정으로 제자가 되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하나 둘 떠났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떠난 후 한동안 공허한 마음에 힘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인내하며 그는 합죽선의 길을 간다.

“제작 과정도 힘들고 최근에는 수요도 줄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라져 가는 기술이기 때문에 내가 안 지키면 아예 없어져 버리잖아요? 합죽선이 제 인생의 전부이기도 하고요.”

그런 의무감 때문일까, 그는 2007년부터 꾸준히 기획전시를 통해 합죽선의 아름다움을 알려 왔다. 황칠선, 염색선, 자개선, 옻칠선 등 미적으로 뛰어난 합죽선을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러한 시도와 연결되어 있다. 바로 전수교육관을 마련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보다 쉽고 재밌게, 체계적으로 합죽선 기술을 배우고, 우리 부채에 관해 공부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어떻게든 우리 합죽선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요. 역사의 뒤편으로 그냥 사라지게 둘 수는 없죠. 만졌을 때 기분 좋고, 펼쳤을 때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부채니까요.”

우리 전통이 다음 세대에 자연스레 이어지길 바라는 김동식 선자장. 합죽선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망설이지 않고 찾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리길 기대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글. 최대규 사진. 이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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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