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 물구경의 진술에 숨은 내면 풍광

세검정 물구경의 진술에 숨은 내면 풍광

정약용의 「세검정에 노닌 기록」과「세검정에 노닐며」

 

 

세검정은 비 온 뒤의 폭포가 장관이었다. 비 온 뒤의 물 구경을 한자어로 관창(觀漲)이라고 하는데, 예전의 선비들은 장쾌한 놀이의 하나로 손꼽았다. 세검정의 시내는 평소 물이 적지만 비 온 뒤에는 물살이 드세어, 구경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었다. 정약용은 신해년 즉 1791년(정조 15) 동료들과 관창을 하고는 「세검정에 노닌 기록[遊洗劍亭記]」이라는 유람기를 남기고, 1795년(정조 19) 무더위에 세검정에 나가 바람을 쐰 뒤 「세검정에 노닐고(游洗劍亭)」라는 시를 남겼다.

 

 

세검정에서 관창(觀漲) 하던날

1791년의 산문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세검정의 뛰어난 경치는 소나기 쏟아질 때 폭포를 보는 것뿐이다. 그러나 비가 막 내릴 때는 온몸이 물에 젖으면서 말에 안장을 얹어 교외로 나가려 하지 않고, 비가 갠 뒤에는 산의 물이 이미 줄어들고 쇠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자가 하루 걸이의 근교에 있어도, 성안의 사대부들 가운데 정자의 경치를 전부 만끽하는 사람은 드물다. 신해년 여름, 나는 한혜보 등 여러 사람과 명례방에서 작은 모임을 가졌다. 술이 돌자, 혹독한 열기가 찌는 듯 물씬하더니 검은 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고, 마른천둥이 크릉크릉 소리를 내었다. 나는 박차듯이 술병을 치면서 일어나 말했다. “이것은 폭우가 쏟아질 형상이다. 제군들은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는가?” (중략) 정자에 올라 자리에 죽 늘어서 앉으니, 난간 앞의 수목은 이미 미친 듯이 벌렁벌렁하였고, 싸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이때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더니 산골 물이 갑자기 흘러내려 잠깐 사이에 계곡을 메우고는, 오열하여 핑팽 쿵쾅거리고 모래를 쓸어내리고 돌을 굴려서 뭉클뭉클 내달려 쏟아졌다. 거센 물이 정자의 밑돌을 할퀴자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가 맹렬하여 서까래와 난간이 흔들려 떠니, 오들오들해서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가?” 묻자, 모두 “아무렴, 군말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술을 내오라 하고 찬도 올리게 하고는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들이 교대교대로 일어났다. 잠깐 뒤 비가 멎고 구름이 걷히자 산의 물이 점점 평판해지고, 석양이 나무에 걸리자 자색과 녹색으로 경물이 천태만상이었다. 서로 몸을 베고는 시를 읊으며 희롱하며 누웠다.

 

01. 북한산 향로봉과 비봉 사이를 잇는 비봉능선

02. 정약용은 명례방 거처에서 한치응, 홍시제, 이중련, 윤지눌과 술을 마시다가 천둥소리가 나자 세검정으로 물 구경을 갔다. 그들은 창의문을 통해 나가 세검정에 이르렀다.

뒤에 창의문은 곧, 반정군이 연서에 모였다가 서울도성으로 들어온 문이다.

 

세검정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 168-6에 위치해있다. 영조 때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겨 서울을 방비하였고 북한산성도 수비하게 했는데, 세검정은 총융청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지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영조 때 창건한 것은 아니다. 『궁궐지(宮闕志)』에는 인조반정 때 이귀(李貴)와 김류(金流) 등이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이곳에서 칼을 갈아 씻었기 때문에 세검정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攷)』에따르면 선왕조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세초를 했다고 하였다. 세검정이 중건된 1748년(영조 24)에 영조가 쓴 세검정 현판을 걸었던 듯한데, 현재는 당시의 현판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세검정은 1941년 부근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돼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해 1977년 5월 복원한 것이다.

 

03.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호 세검정터.

영조 때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총융청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지었다고 전한다.

 

 

울적함을 씻고 불안함을 내려놓다

1791년 봄에 정약용은 진주목사로 있는 부친을 뵙고 돌아왔는데, 4월 초 셋째 아들 구장이 천연두를 앓다가 종기로 죽었고, 진주로 갔다 온 일이 무단행동이었다고 견책을 받아 의금부에 구금되었다가 4월 6일에 가까스 로 풀려났다. 곧이어 부사과의 직을 받았고, 5월 23일에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6월 초에 체직되었다. 정약용은 명례방 거처에서 한치응(韓致應, 자 徯父), 홍시제(洪時濟, 자 約汝), 이중련(李重蓮, 자 輝祖), 윤지 눌(尹持訥, 자 无咎)과 술을 마시다가, 천둥소리가 나자 세검정으로 물 구경을 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창의 문을 나가, 부암동의 백사실과 홍제천을 거쳐 세검정에 이르렀다.

 

뒤에 창의문은 곧, 반정군이 연서에 모였다가 서울 도성으로 들어온 문이다. 자하문이라고도 하는데, 정약용은 창의문이라고 했다. 역사를 바꾼 사건을 환기하고,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정약용은 백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사실은 이항복의 호가 백사인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며, 본래 백악(북악)의 별스런 계곡으로서 ‘백악동천’이라고 불리웠다. 정약용 일행이 세검정에 노닐 때 심규로(沈奎魯, 자 華五)도 뒤따라 이르렀다. 그들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해학을 하면서, 순탄치 못한 벼슬길에 느끼고 있었던 긴장감과 울적함을 일시적이나마 씻어낼 수 있었다.

 

04.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와 서울 조망

 

물 구경하며 시를 읊다

1795년에 정약용은 우부승지의 직함을 지녔다가 체직되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그 무렵 상소를 올린 이가환(李家煥)과 이익운(李益運) 형제를 조사하여 오전중에 자복서를 받아오지 않으면 처단하겠다고 분노하였다. 20일에는 우부승지 직에서 체직되어 도로 부사직이 되었다. 5월에는 중국인 주문모가 잠입한 사건이 발각되고 5월 12일 새벽에는 주문모를 숨겨준 죄로 여러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정약용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을 포함한 남인의 여러 인사들에게 노론 벽파나 남인 벽파의 공격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자주 윤지범을 만나 술을 마시며 불우한 처지에서 갖게 되는 불편한 심사를 달랬다. 6월 1일은 초복이었는데, 그 후 무더위가 지독하여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고, 6월 11일 중복이 지난 후 서너 날이 되어 장맛비가 계속되었다. 정약용은 세검정으로 물 구경을 나갔다. 그리고 「세검정에서 노닐며[游洗劍亭]」라는 제목으로 오언율시 1수와 칠언율 시 1수를 지었다.

 

05.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 풍경     06. 백사실계곡이 있는 백석동천의 별서터

 

 

두 벼랑이 서로 합하지 않으면 뭇 골짝에

 

흐르는 물 어찌 모이리?

장맛비 근심이 오래다가

짐짓 성문 나와 놀이를 하나니,

너럭바위에는 포말이 차갑게 날고

난간 두른 정자는 녹음 속에 그윽하다.

문틀 위에 군왕의 기운 서리고

임금의 글씨가 이 누대를 압도하네*

 

층성의 복도가 어렴풋 보이고

시냇가 정자에는 종일 속인이 없구나.

바위에 이내가 끼고 나무들 촉촉이 젖었는데

물소리 요란하여 두세 봉우리까지 날아 울리네.

어두컴컴한 시내 골짝에 한가로이 말을 매고

바람 흔드는 격자창에 옷 벗어 걸었네,

우두커니 앉아만 있어도 좋기에

시 다 짓고도 어서 가자 말하지 않노라.

 

[원문]

游洗劍亭(유세검정)

不有雙厓合, 那專衆壑流? (불유쌍애합, 나전중학류?)

祇緣愁雨久, 故作出城游. (지연수우구, 고작출성유.)

飛沫盤陀冷, 蒼陰伏檻幽. (비말반타냉, 창음복함유.)

楣頭有御氣, 宸翰鎭名樓. (미두유어기, 신한진명루.)

 

層城複道入依微, 盡日溪亭俗物稀. (층성복도입의미, 진일계정속물희.)

石翠淋漓千樹濕, 水聲撩亂數峯飛. (석취임리천수습, 수성요란수봉비.)

陰陰澗壑閒維馬, 拍拍簾櫳好挂衣. (음음간학한유마, 박박염롱호괘의.)

但可嗒然成久坐, 不敎詩就便言歸. (단가탑연성구좌, 불교시취변언귀.)

 

* 문틀…압도하네 :

세검정이란 현판은 세검정이 중건된 1748년 (영조 24)에 걸었던 듯한데, 현재는 당시의 현판이 남아       있지 않다.

 

1791년과 1795년에 정약용은 세검정에 노닌 시문을 남겼다. 시문은 물의 격한 기세와 흉흉한 소리를 묘사해 내었다. 울적하고 괴로운 심경은 조금도 말하지 않았지만 물의 기세와 소리는 그 내면의 풍광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시문은 내면의 풍광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아니다. 눈으로 보고 듣는 것, 시문으로 표현하는 것, 내면의 풍광은 각기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약용의 시문은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묘한 괴리는 은폐의 책략인가, 아니면 지독한 고통은 간단히 표현할 수 없기에 행한 불가피한 선택인가. 출처:글. 심경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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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