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람문화가 탄생시킨 명승

그중 금강산이 유람처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다. 금강산은 『화엄경(華嚴經)』에 담무갈보살이 일만이천 권속과 함께 반야(般若)를 설법하고 있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의 금강산이라 여겼다.

조선시대 유람문화가 탄생시킨 명승

명승이라 불리는 공간은 처음부터 명승이 아니었다. 무명(無名)의 공간에 사람이 들고, 사람을 매개로 그곳이 품고 있는 특별한 심미적(審美的) 요소가 세상에 공유되고 각인되면서 명승으로 재탄생한다. 그 가장 큰 동인(動因)은 ‘유람(遊覽)’이었다.


          00.금강산 백천교를 유람하는 사대부[정선(鄭敾)의 「백천교(百川橋)」] ©국립중앙박물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력이 생기면,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길을 나서 새로운 문물을 보고 심신을 수양한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여행’이나 ‘관광’이라 하지만, 선조들은 ‘유람’이라고 했다. 선조들이 가장 애호(愛好)한 유람처는 산수(山水)였다. 산수를 유람하는 문화가 어느 시기에 어떤 장소를 중심으로 발달해 왔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고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선풍을 일으키며 유행한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다만, 유람은 경제적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대부만이 할 수 있는 상류층의 문화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자(孔子)의 태산(泰山) 등정과 주자(朱子)의 형산(衡山) 유람을 본받아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요체를 터득하고자 산수 유람에 나섰다. 유람은 심신을 쉬이고자 하는 여가의 의도가 공존하지만, 도(道)를 체득하여 학문을 도야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행위였다. 산수는 구도(求道)의 공간, 강학(講學)의 공간, 심신 수양의 공간이었다.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일생에 한 번이라도 산수 유람을 다녀오지 않으면 문화 흐름의 대세에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정도였다. 어떤 이들은 유람을 통해 즐기고자 했던 산수를 늘 그리워하며, 고질병 환자처럼 산수에 대한 혹독한 애착심으로 인해 산수벽(山水癖)을 관념처럼 지니고 살았다. 산수에 취해 평생 유람을 다닌 사람도 있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가장 장쾌하고 호탕한 일을 꼽으라면, 단연 유람이 제일이었다.

          01.이형부(李馨溥)의 「화양구곡도」 ©문화재청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유람 처의 첫째 조건은, 수려한 경관이었다. 주로 금강·묘향·지리·삼각·수락·청량·소백·속리·계룡·가야·주왕·덕유산 등 당대 명산을 찾아 유람했다. 그중 금강산이 유람처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다. 금강산은 『화엄경(華嚴經)』에 담무갈보살이 일만이천 권속과 함께 반야(般若)를 설법하고 있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의 금강산이라 여겼다. ‘금강’이란 이름이나 야단법석(野壇法席)처럼 펼쳐져 있는 금강산 일만이천봉도 『화엄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금강산은 고려시대부터 동아시아 불교 성지로 추앙받았고, 경관의 아름다움도 으뜸이었다. 금강산과 더불어 관동팔경도 유람의 명소로 칭송받는다.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함께 유람하는 것은, 산수 유람을 꿈꾸던 사대부들에게 최고의 코스이자 로망이었다.

사대부들은 유람을 통해 산수 체험과 더불어 명현의 자취를 찾는다. 이것은 사대부들의 유람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한 단면이자 전통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청량·지리산 등이었다. 청량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지리산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같은 거유(巨儒)가 그 산을 애호하고 유람했을 뿐 아니라 산록에서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다. 이 산들은 수려한 경승만으로도 유람객을 들끓게 하는 매력이 있었지만, 명현(名賢)의 도학(道學)이 깃든 유람 처로 선호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했던 사대부들은 학문과 생활방식까지 주자를 전범으로 삼으려 했다. 주자의 생각과 행동 중 무이구곡(武夷九曲)은 가장 이상적인 산수 경영과 삶의 방식이었고,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도 사대부들이 구곡을 경영하였고, 가장 대표적인 곳이 노론(老論)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속리산 계곡에 경영한 화양(華陽)구곡이었다. 이곳은 우암을 통해 주자의 도통(道統)이 계승되는 곳으로 인식되고, 사대부들이 무시로 찾아 유람하며 주자와 우암을 기렸다.

                   수많은 제명기가 새겨있는 <거창 수승대> ©문화재청

유람은 하나의 행위 현상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인가에 의미를 부여했고, 기행문인 산수유기(山水遊記)나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 창작의 성행과 같은 문화를 재생산해 냈다. 그중 하나가 무명의 산수 공간을 명승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세상에 칭송받는 명승은 원래부터 널리 알려진 곳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고, 사람을 매개로 명성이 전파되며 명승으로 각인되어 온 것이다. 무명의 장소가 명승으로 재창조되는 중요한 조건은, 수려한 경관 등 그 장소만의 특별한 자질도 있어야 하지만, 사람들과의 직간접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유람을 통해서였고, 그 공간은 유람객들의 입과 글 등으로 전파되어 명승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수순을 밟아 명승으로 탄생한 곳은, 금강·묘향·청량·지리·속리산 등 이름났던 명산을 제외하더라도 일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한민국 명승으로 지정된 곳 중 대표적인 곳은 경상남도 거창군의 <거창 수승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의 <명주 청학동 소금강>과 인제군·속초시의 <설악산> 등이다. 수승대는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과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의 은거와 유람으로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으로 이름났다. 청학동 소금강은 일개 무명의 골짜기였으나, 1569년(선조 2)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유람하며 ‘청학동’이라 이름한 후 문화경관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설악산은 당대를 주름잡았던 장동(壯洞) 김문(金門)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은거와 유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명승으로 기립 받았다. 이곳들의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유람객의 제명기(題名記)는 명승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각인시켜주고 있다. 글.  이상균(강릉원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유람의 재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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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