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6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한국에 들어온 자장면

근대 신문으로 보는 개항 이후 음식 이야기 6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한국에 들어온 자장면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이라는 용어가 변화된 말이다. 작장면은 장을 튀겨 면에 비벼먹는 음식이라는 의미인데 중국 동북지방인 베이징, 산둥등 지방의 토속음식이다. 여기서 튀기는 장은 콩 70%와 밀 30%를 섞어 짜게 발효시킨 춘장이다. 춘장의 맛이 매우 짜서 한국에 비해 얹는 장의 양이 적고 구수한 맛이 없으며 기름기가 많아 느끼한 맛이 강하다. 중국 동북지역의 음식이 한국에 들어온 것인데 들어온 시기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이다.(박정배, 2013,『음식강산 2』,한길사.)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개입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끌고 가면서, 청나라의 장수인 원세개가 청나라 군인들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게 된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와 조선은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으로 청나라와 조선의 상인들은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청나라와 조선의 무역은 사대무역으로 국가가 깊히 개입한 공무역의 성격이 짙었다.


상민수륙무역장정에 따라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의 개항장에 들어오면서 주로 중국 산둥 지방 사람들이 인천등 개항장에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도 주한 중국대사관 통계에서 한국 화교의 94%가 산둥성 출신이라는 사실도 임오군란이후 조선에 건너 온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성 사람이었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조선내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성 사람인 점에서 그들의 향토음식인 자장면도 같이 이 시기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장면의 토착화에 대한 근대 신문기사는 단편적으로 서술하였다. 이에 이글에서는 김만태의 연구(김만태, 「‘짜장면’의 토착화 요인과 문화적 의미」,『한국민속학』50, 2009.)를 기반으로 자장면의 토착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자장면이 개항기부터 한국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것이 곧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신문을 검색해 보면 짜장면은 많이 검색되지 않는다. 현재 80대 이상 되신 분들은 1940년대 짜장면이 흔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1950년 5월 불법 금품선거운동을 고발하는 신문기사에서 선거운동원에게 하는 식사대접으로 빈대떡, 뎀뿌라, 잡채와 함께 짜장면이 등장하는 점에서 이 무렵부터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짜장면은 더 한국사람들과 밀착된 음식이 되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한국의 화교사회가 변화하고 밀가루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국과 공산화된 중국은 국교를 단절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살던 화교들은 중국의 무역거래처와 근거지가 단절되었다. 1922년 조선의 화교증 30%정도가 요식업을 하였는데 30%외 나머지 화교들은 중국과의 무역업을 하였다. 이러던 것이 중국과 국교단절 이후 한국의 화교들은 대부분 요식업을 하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화교음식점은 증가하는데 화교인구나 중국에서 오는 관광객이 전무한 점에서 한국의 화교음식점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증가하던 화교음식점은 1980년대 들어 급감한다. 1970년대 중반 서울의 중국음식점 중 65%가 화교가 운영하던 것에서 1993년에느 6%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화교의 수가 줄면서 결국 화교음식점 수도 줄은 결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화교 주방장의 조수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들이 후에 중국음식점을 차리게 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은 점점 증가하는데, 중국음식점 전체 수가 1958년에는 1702개에서 2006년에는 22,653개였다. 화교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중국음식점을 한국인이 운영한다고 볼 수 있다.

고객이 한국인이 다수가 되면서 짜장면은 좀 더 한국인의 입맛게 맞게 변화된다. 1960년대 이전에는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집마다 고유한 면장이 있었으나 이후 화교들이 탄압받고 해외로 많이 떠나면서 면장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춘장은 중국식 면장에 설탕을 가열해 만든 캐러멀을 혼합한 것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면장이 대량 유통되면서 짜장면 맛은 대부분의 가게가 비슷해 졌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춘장을 볶은 기름은 버려서 느끼한 맛을 줄였고, 춘장에 야채와 물녹말을 넣어서 걸쭉하게 만들었다. 양파가 대량 생산되면서 양파를 짜장면에 많이 넣었는데 양파의 단맛과 수분이 짜장면을 더 달짝지끈하고 걸쭉하게 하였다.

한국은 해방 후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가 많이 들어왔고 쌀의 자급률이 부족했다. 정부에서는 분식을 권장했는데 이것은 중국음식점이 성장하는데 바탕이 되었다. 값싼 밀가루는 짜장면을 싼 가격에 판매하게 했는데, 중국음식점에서 하는 배달과 더불어 짜장면이 한국 대중음식으로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천에 있는 짜장면박물관은 공화춘이라는 중국음식점을 보수하여 만든 것이다. 이 짜장면 박물관에는 자장면의 배달에 관해서도 보여주는데 1960년대 이전에는 판위에 음식을 올려 배달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 음식을 완전히 감싸는 형태의 나무배달가방이 등장하였고 양철가방이 개발된 것은 1970년대이다.  (인천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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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