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21

영월 단종 유배길

사연을 품고 있는 옛길 21

단종 유배길(강원 영월)
세종대왕의 손자이면서도 어린나이에 숙부에 의해 생을 마감한 단종

단종은 문종과 현덕황후 사이에서 1441년(세종 23) 태어나 1448년(세종 30)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된다. 2년 후 문종이 승하하자 1452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6대 임금으로 오른다. 조선에 많은 임금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왕세손과 세자 적통 승계를 완벽하게 이어온 몇 안되는 적통의 임금이였다. 문종은 병들어 죽어가면서 어린 단종을 염려하여,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좌우에서 지켜 줄것을 부탁하지만, 단종 보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켰던 정란(靖亂) 으로,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제거당하고, 제위 3년 되던 1455년 한명회, 권람 등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1456년 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고, 이들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종의 복위 운동을 하다 죽은 사육신들이다.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 교서를 받은 단종은 한양의 돈화문에서 출발하여 남한강 물길을 거슬러 배를 타고 5일 만에 영월의 입구에 다다랐다. 배에서 내린 단종은 육로를 따라 100리 길을 걸어 청령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곳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어 내려오게 되는 길이 슬픈 역사를 간직한 단종 유배길이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사사되자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되고,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다 1457년(세조 3) 10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는다. 그 후 243년 만에 1698년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으로 결정하면서 다시 왕으로 된다.


                            영월 청령포


남한강을 따라 이동할 때에는 경기도 여주시 이포나루에 도착해 강을 건넌 후 샘물에서 물을 마시고 갔다는 데에서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물이 생겨났다. 이 우물은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주에서 강원도 원주시를 지나 영월군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치악재와 싸리재를 거쳐야 한다. 치악재는 원주 시가지를 지나 신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싸리재는 신림면에서 영월군 주천면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개이다. 싸리재는 단종의 유배 행렬이 통과했던 옛길로 잘 알려져 있다. 싸리재를 넘은 행렬은 영월군 주천면에 당도했다. 주천면에서 한반도면을 거쳐 서강이 둘러 휘감는 청령포에 도착한 것이다. 싸리재를 지나 솔치재를 넘어 주천면에 다다르고 주천면에서 군등치를 넘어 한반도면으로 진입했다. 청령포에 진입하기 전에는 배일치라는 고개를 넘었다.


                                 싸리재 옛길




군등치에는 어린 단종의 한이 깊게 서려 있다고 한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매우 아름답지만, 유배길에 올랐던 단종의 슬픔과 한을 이해하면 애잔한 마음이 들 것이다. 군등치는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서 한반도면 신천리로 이어지는 길로, 서강에 합류하는 평창강의 강변을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로 굽이굽이 이어진다. 이 고개는 단종이 유배길에 넘었던 많은 고개 가운데 가장 험준한 고개였다고 한다. 군등치라는 지명은 호송 책임자였던 왕방연이 노산군인 단종이 올랐으니 군등치(君登峙)라 부르자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양에서 영월까지 오는 유배길이 힘들고 피로해 병이 날 만큼 지친 단종은 주천면에 도착하여 느티나무 그늘에서 무더운 삼복더위의 불볕을 피했다. 힘든 길을 이동하던 단종이 이 느티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데에서 이곳은 느티나무 쉼터로 불리게 되었으며, 공원 입구에는 '쉼터'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단종은 바위에 걸터 앉아 한양쪽을 바라보니 자신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사육신과 어머니 현덕왕후가 떠올라 그 그리움과 고마움 그리고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행렬은 한참 동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단종의 한을 뱉어 낸 자규시 子規詩(소쩍새시)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暇眠夜夜眠無暇(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岺殘月白(성단효령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 부리엔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何乃愁人耳獨廳(하내수인이독청)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


주천면에서 군등치를 넘어 청령포로 향하던 영월지방의 유배길은 현대에 와서 3개의 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단종에게 내린 사약을 직접 들고 가던 신하들이 울부짖으며 걸어갔던 슬픈 통곡의 길, 죽음으로써 단종을 향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사육신과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잘못된 것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관직을 내 던지고 임금과 의리를 지켰던 생육신의 의지가 담긴 충절의 길,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모셨던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가 지켜낸 인륜의 길 등이다.

육로를 통해 청령포까지 이어지던 단종 유배길은 원주시 신림면에서부터 국가지원지방도 88호선의 노선과 대체로 일치한다. 싸리재를 통과하는 구간은 신림터널이 개통되었고 솔치재에는 솔치터널이 뚫렸다. 배일치에는 배일치터널이 통과한다. 지금은 자동차를 타고 서울에서 청령포까지 3시간 정도면 이동할 수 있지만, 어린 단종이 이동했던 유배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이미지  다음 캡쳐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