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 보훈의 달 4

대전지구 전적비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4

대전은 한국전쟁 당시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로 인구 13만명이었고,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대전은 500~800m 고지군으로 둘러싸인 도시로서 일대에는 갑천, 유등천, 대전천 등 3개의 작은 하천이 있었다. 남한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는 철로교통의 중심지이자 육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1950년 7월 초, 오산 죽미령에 전개한 유엔군 미 제24사단은 북괴군 T34전차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후 평택, 천안, 조치원으로 이어지는 방어작전을 전개 하였지만 끊임없이 증원되던 북한군의 전력에 밀려 계속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천연적 장애물이라고 여겨졌던 금강선마저 맥없이 무너졌을 때 모두들 패배를 예감했다. 그러나 미제24사단장이었던 딘(William F. Dean) 소장의 지휘 아래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대전차 화기인 3.5인치 로켓포를 이용해 처음으로 적 전차를 공격했다. 딘 장군은 대전과 유성 사이의 갑천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전비행장으로 사단사령부를 지정하는 한편, 대전에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 요원들을 대구로 철수시켰다. 당시 미 제24사단의 방어계획은 "제34연대가 증원군이 도착할 수 있는 7월 20일까지 대전을 방어하고, 제21연대가 대전 북동쪽의 방호와 제34연대의 철수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대전을 둘러싼 계족산~식장산의 동쪽 능선을 피탈당해 대전 시가지가 포위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딘 장군은 대전 방어의 진두지휘를 위해 대전에 남았다. 악전고투를 계속하던 중 19일 새벽 북한군 YAK 전투기가 옥천과 대전비행장을 폭격하였고, 북한군 제3사단, 4사단이 유성과 논산방면에서 각각 공격을 시도하며, 미군의 방어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 제19연대 2대대가 긴급 투입되어 사태를 진정시키는 듯 했으나 19일 야간에 대전 후방에서 진격해 온 북한군에 의해 진지가 무너지고, 북한군은 그대로 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려 버렸다. 단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미군은 급히 3.5인치 로켓포를 배치하였다. 북한군 T34전차를 막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던 미군은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급히 제2차 세계대전 말에 개발된 3.5인치 로켓포를 한국으로 보냈고, 7월 20일 투입되었다. 3.5인치 로켓포가 투입되자 대전 시내에서는 유엔군과 북한군 간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격전 끝에 북한군 전차는 총 10대가 격파되었지만, 북한군의 포위망은 계속 좁혀지고 있었다. 후방이 차단될 위기에 놓인 유엔군은 20일 오후 5시경 철수를 시작하였다. 사흘간의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수백 명의 적군을 사살하였고, 전차 15대·대포 21문을 파괴하는 전투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제24사단도 30%의 병력과 65%의 장비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뼈아픈 패배로 끝난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로 인해 아군에게 낙동강 방어선 강화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의 작전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함과 동시에 반격의 기회를 도모하는 데 공헌했다. 철수가 시작되었으나 둘러싸고 있는 적의 포위망을 뚫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후퇴하는 유엔군들은 세천터널을 지나면서 매복하고 있던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고, 그 과정에 미 24사단장 딘 장군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딘 장군은 실종 이후 36일간 북한군을 피해 달아났으나 결국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북한의 포로가 된 딘 장군을 북한군의 선전자료로 활용되었다. 심한 고문과 혹독한 포로생활로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딘 소장은 포로교환 제의 끝에 판문점을 통해 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국은 포로로 잡혔지만 끝내 지휘관이었던 그를 추앙했지만, 본인은 포로였던 사실을 평생 부끄러워했다. "패장은 병법을 논하지 못한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전술을 강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군의 엄격한 군기와 공산국가에 대하여 미국민들이 경계해야 할 점에 대해 충고를 하러 온 것이다" 미 지휘참모대학 특별강사로 초빙된 딘 장군이 강의 서두에 했던 말이다. 비록 대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지휘관으로 인정받은 딘 소장은 1981년 82세로 영면하였다.

                                                        대전지구 전적비

대전지구전적비의 동상은 3.5인치 로켓포를 장전한 딘 장군과 미군 장병의 모습을 담고 있다.

                              미 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장군의 사진

          6.25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가 최초로 북괴군 전차를 격파한 역사적인 순간이다.


                   대전비행장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
 
대전 전투 당시 미군 사단사령부가 주둔했던 대전비행장 자리는 현재 보라매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전시청이 바라다 보이는 넓은 잔디밭이 있는 보라매공원 한쪽에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가 있다. 호국영웅비 우측면에는 6·25전쟁 대전지구전투 미군 전사자 818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여기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대전을 사수한 파란 눈의 호국영웅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전 전투가 벌어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사이에 지연선 방어작전에 투입됐던 유엔군과 국군 1,150명이 부상, 실종, 또는 전사를 하였다. 부대의 장비 또한 대부분 잃었다. 비록 후퇴를 거듭하며 막대한 피해를 당한 패배에 가까운 전투였지만, 이들의 목숨을 건 전투가 아니었다면 미국 본토에서 온 증원군이 부산에 상륙해 낙동강 방어선에 전개할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또한, 딘 장군은 대전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앞서 북괴군 남하의 주이동로인 신탄진 철교와 대평리 교량을 폭파하였다. 이 작전이 없었다면 북한군의 진격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6·25전쟁 당시 우리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던 파란 눈의 영웅들에게 감사함과  북괴에 대하여 각오를 다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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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