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오백년 역사에서 깨어나는 한산모시

천액년동안 최고의 옷감으로 인정 받아 온 한산모시

한산모시는 예로부터 그 시원함을 으뜸으로 하며, 맑고 고상함과 아름다움을 함께함으로써 여름철 옷감으로 최고임을 인정받아 왔다.

한산모시짜기는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보유자로는 방연옥(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박미옥(충남무형문화재 제1호) 등 국가와 지자체로부터 인정받은 전통직조기능 보유자들이 1993년 8월 개관한 한산모시관에서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한편, 관광객들이 한산모시를 바로 알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시풀을 처음 발견했던 건지산(170m)기슭에 모시각, 전통공방, 한산모시 전시관, 토속관, 전수교육관, 방문자센터, 모시체험장 등의 시설을 100,000㎡ 규모로 갖추고 있다.




한산에서 모시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대 때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건지산에 올랐다가 모시풀을 발견하고 이를 가져와 재배하여 모시 만드는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모시 짜기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서천지역의 저산 팔읍은(한산, 서천, 비인, 남포, 홍산, 정산, 부여, 임천) 연평균 높은 기온과 강수량, 나지막한 산세로 모시 재배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품질이 우수한 모시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한산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라는 말이 구전될 만큼 자연을 담은, 아름답고 섬세한 모시로 탄생하기까지는 태모시만들기-모시째기-모시삼기-모시날기-바디끼워새몰기-모시매기-씨실꾸리감기-모시짜기-표백과 다듬질 등 4000번 이상의 손길 과정을 거쳐야만, 가늘고 섬세한 세모시로 탄생한다. 섬유의 굵기가 고르고 질겨 모시 표면의 결이 곱고 세탁 후에도 잔털이 많이 생기지 않는 특징이 있다.

필모시의 등급은 한 폭에 승수(올수)가 몇 개 있는가에 따라 중품( 670~690올), 상품(700~780올), 특품(780~800올), 명품(880올 이상)으로 구분되고 있으며, 들꽃, 열매, 풀, 뿌리, 흙, 조개 등 자연 속에서 추출된 염료로 다양한 색상으로 천연염색을 한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때 저포를 해외로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는 농가의 중요한 부업의 하나였으며, 화폐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 택리지 복거총론편을 보면 한산모시는 섬세할 뿐만 아니라, 단아하고 청아한 멋이 있어 모시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그리고 고려 시대 때는 명나라에 바치는 공물로 유명했고,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으로도 그 명성을 떨쳤다.

모시는 한자로 저 (苧, 紵), 저포(苧佈), 저마포(竹麻佈) 등으로 불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자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에서 삼십승저삼단(三十升紵衫段)을 당나라에 보낸 기록이 있다. 계림유사(鷄林類事)란 책에는 저왈모시(苧日毛施), 저포왈모시배(苧布日毛施背)란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일찍이 고려 시대에도 저와 섬유를 모, 저마포를 모시배라고 일컬었음을 나타낸다. 고려사(高麗事)는 혜종 때 진나라로 보낸 세저를 마저여설(麻紵如雪)이라고 적고 있어 세저의 깨끗함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 이들 직물(문저포, 사저포)을 선호하여 수출을 요구해 온 기록도 많다. 모시가 외국에 알려진 기록으로는 고려 인종 원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글에 “모시가 백옥처럼 희고 맑아 결백을 상징하고, 윗사람이 입어도 의젓함이 나타나며, 백저포로는 상복을 삼았다”고 남겨져 있다. 서천군 한산면 충절로 1089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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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