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를 기리는 남과 북의 서원 임고서원(臨皐書院) vs 숭양서원(崧陽書院)

조선은 건국의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복관시키고 그를 불사이군의 충절로 재평가했다. 그것이 정치일까? 천명으로 왕조가 바뀌고 충역이 교차하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정몽주를 기리는 남과 북의 서원 임고서원(臨皐書院) vs 숭양서원(崧陽書院)

정몽주, 이성계, 정도전. 이성계와 정도전을 이어준 이가 정몽주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을 맞서게 만들었다. 물러설 수 없는 싸움 속에서 정몽주는 살해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건국의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복관시키고 그를 불사이군의 충절로 재평가했다. 그것이 정치일까? 천명으로 왕조가 바뀌고 충역이 교차하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01.임고서원 전경 ©영천시청   02.숭양서원 외삼문 ©김성환



포은을 모신 서원들

고려 말 거유(巨儒)였던 이색은 정몽주를 ‘동방리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평했다. 동방성리학의 도통(道統)은 그에게서 비롯되었고, 이후 절의와 도학(道學)에서 포은에 대한 인식은 확대되었다. 조선시대에 포은을 배향한 서원은 13곳. 그 중 포은이 태어난 영일 오천서원, 고향인 영천 임고서원, 관료로서 활동했던 개성 숭양서원, 죽어서 묻힌 용인 충렬서원은 4대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경상도의 언양 반구서원·용궁 삼강서원·상주 도남서원·울산 구강서원, 전라도의 운봉 용암서원, 평안도의 순안 성산서원, 함경도의 정평망덕서원·함흥 운전서원·영흥 흥현서원이 있었다.

서북한 지역에서 그 수가 적은 것은 많지 않았던 사족(士族)의 수 등 사회적인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현재적인 관점에서 임고서원은 남한에서 포은을 모신 대표 서원으로, 숭양서원은 북측에서의 대표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원이 정치·사회적인 기능을 했던 조선시대에 숭양서원은 경기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포은을 모신 서북한 지역의 서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임고서원과 숭양서원

임고서원과 숭양서원은 포은정신을 떨치려 했던 사림의 교학기구였다. 그 창건 배경에는 퇴계 이황과 화담 서경덕이 있었다. 두 곳 모두 포은의 시호인 ‘문충(文忠)’에서, 즉 임고서원은 묘우인 문충사, 숭양서원은 문충당에서 출발하였다. ‘임고’는 신라 경덕왕 때 영천의 옛 이름으로, 그 지역을 대표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숭양’에는 포은의 충효 유지가 후세에 숭산(崧山, 송악산)의 남쪽에서 떨쳐질 것이란 뜻이 담겨 있었다.

임고서원은 1553년(명종 8)에, 숭양서원은 1573년(선조 6)에 건립되었다. 두 곳 모두 국왕으로부터 서원 이름의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받아 조선왕조가 사회적인 권위를 공인한 사액서원이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할 때 포은을 모신 서원 중에는 숭양서원만 남았다. 이후 임고서원은 복원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숭양서원은 북측의 국보 문화유물이면서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다. 숭양서원은 광복 후 북측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는데, 일찍부터 해주 소현서원, 평양의 용곡서원과 함께 북측의 3대 서원유산으로 선정·보호되었다.

03.정몽주 초상(보물) ©경기도박물관   04.흑백으로 남은 옛 숭양서원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05.임고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탔는데 이원익이 중창했다. ©영천시청



두 서원에서 간행된 『포은집』

『포은집』은 1439년(세종 21) 아들 정종성이 시집을 초간한 이래 여러 판본이 간행되었다. 임고서원에서는 1584년(선조 17) 왕명으로 류성룡이 교정하고 발문을 쓴 「영천구각본」과 1607년(선조 40) 임진왜란에 소실된 「영천구각본」을 중간한 「영천중간본」이 간행되었다. 1866년(고종 3)에는 17대손 영천군수 정원필과 임고서원 유생들이 문집을 간행했고, 1900년에는 정환익 등이 속집을 중간하였다.

숭양서원에서는 1719년(숙종 45) 11대손 정찬휘가 정리한 원고를 바탕으로 1769년(영조 45) 재종손 정관제가 개성유수 원인손과 수교(讎校)하여 원집과 속집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연활자로 『신편포은선생집』 2권 1책을 중간했다. 또 여기에서는 1796년(정조 20) 왕명으로 『어정규장전운』을 비롯하여 여러 서적이 반사(頒賜)되었다.

1740년(영조 16) 국왕은 개성에 행차하여 포은의 ‘도덕정충(道德精忠)’을 어제어필하여 포정(褒旌)하였고, 선죽교 근처에 표충비를 건립한 뒤 치제했다. 다음해에는 표충비에 있는 어시어필(御詩御筆)을 판각해 숭양서원에 현판을 걸고 다시 치제했다. 숭양서원에서는 역대 9차례에 걸친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모두 국왕의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1811년(순조 11)에는 서원의 역사를 정리한 묘정비가 세워졌고, 1823년에 중건되었다. 이 같은 위상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포은을 모신 서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듬해에 왕명으로 그 내력을 정리한 기실비(紀實碑)를 세웠다.


두 서원이 왕래하는 날!

임고서원은 영남학을, 숭양서원은 기호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학풍을 달리하던 서경덕의 문인과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이이·성혼의 문인은 임고서원을 방문한 바 있다. 임고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옛터 한 칸짜리 초가집에 포은 영정을 모실 수밖에 없었는데, 1600년 이곳을 방문한 이원익이 중창했다. 숭양서원은 17세기 말 이래 김석주, 김원행 등 노론계 서인과 채제공 등 남인계 인사들이 방문했고 그들이 서원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로 75년 이상을 갈라져 있는 임고서원과 숭양서원은 포은을 모신 남북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그동안 두 서원의 왕래도 끊겼다. 임고서원에 복원되어 있는 선죽교는 왕래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출처 김성환(전 경기도박물관장, 포은학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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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