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월악으로 부터 시작하여 흐르는 물이 오대산의 물과 합하여 여주에 와서는 한강의 상류인 여강이 된다. 그 주위에 나지막한 봉미산이 있고, 이 산의 꼬리가 여강에 뻗어내린 가운데 신륵사를 세웠다.

여주 신륵사

신륵사는 산지 가람이 아닌 풍광 좋은 강변에 자리를 잡았다.
월악으로 부터 시작하여 흐르는 물이 오대산의 물과 합하여 여주에 와서는 한강의 상류인 여강이 된다. 그 주위에 나지막한 봉미산이 있고, 이 산의 꼬리가 여강에 뻗어내린 가운데 신륵사를 세웠다.



강기슭에 있는 돛배는 황포를 연신 강바람에 펄럭이며 옛 생각을 끄집어 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일렁거리는 물살을 가르며 나옹선사를 만나러 가는 길인가 보다. 하지만 나옹선사의 유명세에 비하면 신륵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매우 적다.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추측일 뿐이다.

신륵이라는 것은 신기한 미륵 또는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한편으로 고려 고종때 강건너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서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印塘)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용마가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 해서 절 이름을 신륵사라 고했다.


강 가운데 마암이 숱한 사람들의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그 강에서 황마와 여마가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의 이름을 황려라고 하였다.
이규보의 詩에 "기이한 쌍마 물가에서 나오매, 황려라는 현 이름 이로부터 생겼네. 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캐묻지만, 오가는 늙은 어부야 어찌 알리"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마암을 칭송하는 글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홍수의 재해로부터 안전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에 의한 산천비보사상으로 지세가 약한 곳에 절을 세움으로서 강물의 범람을 막고자 한 것이다.
고려 때에는 벽절이라고 불렀다. 경내에 다층전탑 (보물 제226호)이 있는데 이 탑은 전체를 벽돌로 쌓아 올린 것이기에 유래한 것이다.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대모산에 있던 영릉이 여주로 천장된 예종1년(1469)부터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이 여러 곳에 원찰을 세움으로 그 폐단이 심하여 충선왕때는 귀족의 원찰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원찰을 새로 짓기보다 신륵사를 중수해서 원찰로 하기로 하고 민폐가 없도록 당부하였다. 성종3년(1472) 2월에 시작하여 10월까지 중수를 마쳤다. 수리하고 새로 지은 것이 모두 200여 칸이 되고 종과 북, 모든 도구를 바꾸었다. 이듬해 대왕대비(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는 신륵사를 보은사로 고쳐 불렀다. 대왕대비는 예종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여 성종 7년까지 섭정을 했다. 특히 그는 불교신앙이 깊었는데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정인사도 중수하였다.

고승 신미의 아우 김수온이 '신륵사중수기문'에 이렇게 적었다.

"신륵사 풍광의 아름다움은 우리나라에 소문난 것으로 사대부들이 바람에 돛을 달고 왕래하여 유람선이 서로 연달았으나, 아직 한 번도 그 절을 일으키고 중창하지 않더니 다행히 이제 황려대부는 천 백년 산천의 기운이 모여 가만히 간직되어 있다가 오늘날 선왕의 능을 이 고을에 옮겨 큰 경사가 시작되었으니, 이에 府가 승격되어 州가 되고 절도 또한 일신되니, 이것은 바로 때를 기다린 것이다. 대왕대비전하께서 선왕의 끼치신 뜻을 생각하여 능을 옮기고 절을 세웠으니 이로써 잘 계승하고 크게 나타낸 아름다움이 여러 선왕에 빛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신륵사가 사대부들이 즐겨 유람하던 곳이 되었다. 지금도 신륵사를 읊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

이처럼 유학자들이 풍류를 즐기는 좋은 장소로 전락했던 것은 한양에서 멀지 않은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핍박받던 당시의 사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보물 제225호 다층석탑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삼층석탑



그 후 병화로 방치된 것을 현종12년(1671)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영조2년(1726)에 전탑을 다시 수리하였다. 철종9년(1858)에 왕실의 힘을 입어 다시 중수되었다. 이때는 익종의 어머니이자 헌종의 조모로 철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하던 순원왕후의 발원에 의한 것이다. 순원왕후는 사비인 내탕전을 내놓고 크게 중수를 하였다.

나옹선사는 배를 타고 밀양 형원사로 귀양 가던 중에 병세가 악화되어 신륵사에서 내렸다. 그리고 1376년 5월 보름 5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스무살에 친구의 죽음에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한 스님은 그렇게 떠났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그렇게 노래 부르며 영원히 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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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