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존중으로 돌아온 우리의 영혼 한 부분 《겸재정선화첩》

“내가 그토록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이라고 자술했던 베버 대원장은 수집, 저술, 사진, 영화, 기록, 수채화 등을 통해 빠르게 사라져 가는 한국 문화를 보존하려고 애썼다. 한국 구전 동화까지 독일어로 출판할 정도로 한국 문화를 총체적으로 탐구한 ‘심미가’였다.

신뢰와 존중으로 돌아온 우리의 영혼 한 부분 《겸재정선화첩》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정선화첩》(이하 화첩)만큼 국민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는 ‘돌아온 문화재’는 드물다.


국가와 국가 간에 쌓인 신뢰와 존중의 마음이 이야기를 계속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돌아온 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주무 관청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혜로운 활용도 주효했을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서의 돌아온 문화재’라고 표현하고 싶다.


 정선, <금강내산전도>, 견본담채, 33.0 x 54.3cm  ⓒ왜관수도원




한국과 한국 문화를 사랑했던 사람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초대 대원장은 1925년 한국 선교지 시찰 중에 겸재 정선의 그림 21점을 구입하였다. 이때 지인들과 함께 금강산도 유람하였는데, 1927년 독일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제목으로 여행기를 발간하였다. 베버 대원장은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언급한 그 주목할 만한 고고학자이자 일본어와 독일어로 발간된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안드레아 에카르트를 한국에 파견한 장본인이다. “내가 그토록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이라고 자술했던 베버 대원장은 수집, 저술, 사진, 영화, 기록, 수채화 등을 통해 빠르게 사라져 가는 한국 문화를 보존하려고 애썼다. 한국 구전 동화까지 독일어로 출판할 정도로 한국 문화를 총체적으로 탐구한 ‘심미가’였다.

전 이화여대 교수, 유준영 선생은 쾰른대학교 유학시절, 도서관에서 상술한 『한국의 금강산에서』를 찾아 읽다가 세 폭의 겸재 그림이 도판으로 실린 것을 발견하였다. 박사학위를 거의 마쳐 가던 1975년 3월 오틸리엔을 찾아가 그곳 선교박물관에서 화첩을 실견하였다. 귀국 후 그는 『미술자료』 제19호에 간략히, 『공간』 제115호에 소상히 화첩의 존재를 알렸다.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화첩은 줄곧 금고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실지로 그랬다. 한국의 책가도(冊架圖)를 평생연구한 케이 E. 블랙과 전 독일 킬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에카르트 데게가 공동 집필한 「상트 오틸리엔 소장 정선의 진경산수화」라는 제목의 논문이 1999~2000년 겨울 호 『오리엔탈 아트』에 게재되었다. 뉴욕 크리스티의 집요한 관심 등으로 화첩의 지명도는 높아져 갔다.

그리고 2005년 9월 초순, 오틸리엔의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가 쓴 편지가 느닷없이 도착했다. “선지훈 신부가 언젠가 저에게, 왜관수도원에 화첩을 위한 전시관을 건립할 용의가 있는 한국 대기업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와 장로회는 왜관수도원이 화첩의 소장을 원하고, 화첩의 적절한 전시공간을 마련한다면, 이 화첩을 ‘영구 임대’ 형식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뉴욕의 크리스티사도 줄곧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매각할 뜻이 전혀 없습니다.” 왜관수도원도 신속히 움직였다. ‘한국의 영혼 한 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다’라는 현지 신문의 기념비적인 표현대로, 화첩은 2005년 10월 29일, 꼭 80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왔다.

고산방학도  ⓒ왜관수도원




우리의 혼을 사심없이 돌려준 오틸리엔 수도자들

고국으로 돌아온 화첩은 근 1년 동안 긴 여행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2006년 11월 20일, 화첩 반환 사실을 어찌 알고 찾아온 한 중년의 기자를 만났다. ‘수도원의 구조적 특성’을 감안하여 보도는 추후 상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매스컴의 생리적 특성’에 허를 찔렸다. 중앙일보가 11월 22일 1면 머리기사와 5면 관련기사로 단독 보도하였다. 새벽부터 왜관수도원은 방송국 차량과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당일 서울에 있던 필자는 왜관수도원 분원인 서울 장충동 피정의 집에서 오후 2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녁 뉴스와 익일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위상이 달라진 화첩은 2009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이 기획한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특별전시 ‘겸재 정선,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전’에 초대되었다. 2009년 10월 KBS 역사스페셜 제12회 ‘수도원에 간 겸재 정선, 80년 만의 귀환’은 정점이었다. 2018년 2월, ‘금강산: 한국 미술 속의 기행과 향수’라는 주제로 기획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에도 다녀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3년 돌아온 문화재 총서 1권으로,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을 냈고, 2019년에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라는 제하의 컬러판 도록을 발간하였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사랑에 대한 국가 차원의 품격 있는 화답이다. 영문판도 곧 나올 것이다. 상트 오틸리엔은 이제 한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화첩의 귀향은 ‘환수’라기보다 자발적인 ‘반환’이었다. 화첩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한국인의 혼을 사심 없이 돌려준 오틸리엔 수도자들의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오틸리엔은 이후에도 조선시대 갑옷을 반환하였다. 화첩의 전시 공간 마련과 ‘영구 임대’를 ‘완전 반환’으로 변경하여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마음이 절절하다.


(Time Line 귀환 연보)

1911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 2월 21일부터 6월 25일까지 1차 한국 체류

1925
베버 총아빠스, 5월14일부터 9월 27일까지 2차 한국 체류, 이 시기에 겸재정선화첩 입수 추정

1927
베버 총아빠스 한국의 금강산에서 출판. 이 책에 겸재정선화첩에 실린 금강내산전도, 구룡폭도,
화표주도 3점의 흑백사진이실림

1973
유준영 교수, 독일 쾰른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 집필 중 한국의 금강산에서에 실린 3점의

정선 그림 사진 확인


1975
유준영 교수, 고미술품을 좋아하는 토마스울브리히와 상트오틸리엔수도원을 방문해 화첩 발견

1976
유준영 교수, 이 화첩을 한국학계에 최초로 소개

1980
뮌헨 바이에른 주립고문서연구소에 근무하던 베네딕도회 수녀가 이 화첩의 보존처리 자원

2005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반환요청으로 오틸리엔수도원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가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반환을 결정


2007
4월 6일 새벽 왜관수도원 본관에 화재가 발생했으나 다행히 안전하게 화첩을 구함

2010
4월 30일 이후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    출처/선지훈(왜관수도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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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