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장사의 향기를 찾아서

코로나19의 일상 속에서 법당 안의 방석까지 만지기가 머뭇거려지는 참으로 고약한 이때, 사찰 여행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칠장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 七長寺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안성 칠장사는 수도권 나들이로 다 녀 올만한 곳이다. 임꺽정이 드나들었다는 칠장사는 빼어난 자연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 산이 깊다. 관헌에 쫓기던 임꺽정이 칠장사에 드나들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하다.

코로나19의 일상 속에서 법당 안의 방석까지 만지기가 머뭇거려지는 참으로 고약한 이때, 사찰 여행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칠장사 배치판



이곳 칠장사가 있는 안성 죽산 칠장리의 칠현산에 수줍은 듯 안긴 칠장사는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가지런히 높낮이로 배치돼 있다.

마당은 살림집인 한옥에서 출발했다. 한옥은 구들방이 있어서 한겨울에도 스물네 시간 따뜻하다. 조선 시대에 구들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마당도 보급되는데, 전통 건축물의 외부 공간은 중정과 마당이 뒤섞이며 우리만의 독특한 건축 공간을 창조해 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사찰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던 불당 앞의 탑과 회랑(回廊, 지붕이 있는 외부 통로)이 점차 사라지고, 마당을 중심으로 불당과 요사를 짓는 건축이 나타났다. 스님들이 생활하는 살림집인 요사에 부엌을 들여 건물 앞뒤의 소통이 원활해진 것도 이 시기다.

칠장사 역시 마당을 중심으로 한 사찰이다. 칠장사의 건물 배치는 입구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일주문, 천왕문을 거쳐 대웅전까지 오고, 대웅전 마당에서 사찰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구조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산문으로 난 길을 따라 대웅전으로 향하고, 이곳에서 부처를 만나 깨달음을 얻어 주변의 전각을 돌아보면서 보살이 행한 실천을 배운다는 이야기 틀을 함께 가진다. 부처는 깨달음을, 보살은 중생을 위한 헌신을 상징한다.


일주문 너머로 경내에서 들려오는 독경 소리를 따라 해본다. 칠현산(七賢山)에 안긴 칠장사(七長寺)는 수줍다. 몇 년전에 산사음악회 때와는 사못 다른 풍경이다. 일주문 오른쪽으로 주차장과 지역 농산물을 팔고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언덕 위에 천왕문으로 들어서면서 잠시나마 부처의 향기 속으로 빠져든다. 주차장 왼쪽에 생뚱맞게 서 있는 일주문은 원래는 없던 건축물이다.


일주문 입구에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39호 철당간

칠장사는 600년대 자장(慈藏, 590~658)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확 하지가 않다. 칠장사가 가장 번성한 것은 혜소국사(慧炤國師,972~1054)가 살던 고려 문종 때다. 혜소가 국사의 칭호를 받은 시기도 이때쯤이다. 조선 숙종 때인 1704년,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이 들어섰다. 이마저도 화재로 몇 개의 건물이 소실되고, 일부는 자리를 옮겨 다시 지어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현재 남은 건물과 건물의 배치는 숙종 때와 다르다.



천왕문을 통과하며 대웅전으로 가는 것이 순례의 기본이지만 칠장사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엉뚱한 곳에 만들어진 주차장 때문에 천왕문을 통해 대웅전으로 가려면 차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현대 건축의 실용성이 전통 사찰에 파고든 까닭이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산문(山門)으로서의 상징성을 잃고 용도 불명의 건물이 되고 말았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천왕문은 수미산 중턱을 차지하고 호령하는 사천왕의 자리로 안성맞춤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여차하면 달려들 듯한 사천왕상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불국정토를 지키는 수문장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다른 사천왕상과 달리 이곳의 사천왕상은 흙으로 빚어 피부의 질감이 살아 있는 듯하다. 이문을 지나며 불자들은 사천왕의 눈에 비친 자신들을 돌아보고 마음속 번뇌를 털어 내고 있을 것이다.



칠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대웅전 / 석가모니불 뒤의 탱화가 영산회상도

사천왕문을 지나면, 정면 좌측위에 보물2036호인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칠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경건한 맞배지붕(책을 펴서 엎어 놓은 모양의 지붕)이다. 대웅전은 앞에서 보면 세 칸으로 된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기둥 사이에까지 포를 두어 지은 다포 건물이다. 포는 지붕 아래 비쭉비쭉 나온 부재 덩어리인데, 지붕을 받쳐 줄 뿐 아니라 건물을 아름답게 치장한다. 자칫 지나치게 화려할 수 있는 것이 단청이지만, 대웅전을 감싼 단청은 세월의 가르침을 받아 수도승처럼 수수하고 차분하다.

독경 소리에 밀리듯 뒤꼍으로 돌아드니 꽃살문이 시선을 잡는다. 꽃살 문양은 연꽃인데, 조각이 단순하지 않다. 꽃망울이 맺혔다가 연꽃으로 활짝 피는 과정을 묘사했다. 깨달음의 과정을 연꽃의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문이 사찰에서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묵직하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마당, 선방,

대웅전과 함께 월대 위에 자리 잡은 원통전은 기둥에만 포를 넣은 주심포 건물로, 대웅전보다 격을 낮추어 지었다.



명부전은 월대에서 내려와 마당의 낮은 자리를 차지했다. 낮은 곳으로 임하려던 지장의 뜻을 살렸다.


대웅전 옆의 원통전은 천 개의 눈과 손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원통전은 기단을 조금 낮게 해서 대웅전보다 격을 낮추었다. 지장보살은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부처가 되기를 미루기로 한 보살인데, 이를 모신곳이 명부전이다. 명부전은 아예 대웅전이 앉은 월대(이중으로 된 넓은 기단) 아래로 내려지어,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지장의 마음을 건축에 담았다.

이때 마당은 보살행을 배우도록 하는 소통의 공간이 된다. 원효가 저잣거리로 간 속 깊은 깨달음도 마당에 숨어 있는 셈이다. 마당 가운데 자리한 석탑은 다른 곳에 있던 것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사찰의 전체 배치를 고려하지 않은 듯해서 어중간하다. 원통전과 명부전을 돌아봤으면 꼭 들러야 하는 칠장사의 명물이 있다.


혜소 국사비 (보물 488호)




나한이 된 일곱 도적 이야기

대웅전 마당을 벗어나 언덕길을 감아 돌면, 전망 좋은 자리를 차지한 한 칸짜리 작은 건물을 만나게 된다. 건물 밖으로 새시를 달아서 조악해 보이지만, 그 안으로 나한전이 숨어 있다. 나한전에 들어서면 아이처럼 티 없는 일곱 나한이 사람을 맞는다.

고려 말 나옹 선사가 심었다는 소나무(나옹송)를 우산처럼 쓰고 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오는 대로 운치가 있다. 칠장사에는 나한전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이 내려온다.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주변에 일곱 명의 도적 무리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갈증을 이기지 못해 칠장사의 샘을 찾아왔는데, 물을 마시고 보니 방금 물을 담아 마신 바가지가 금으로 된 값진 물건이었다. 옳거니 하고 이를 옷 속에 숨겨 갔음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 일곱 명의 도둑이 시간차를 두고 모두 같은 방식으로 물을 마시러 왔다가 금 바가지 하나씩을 챙겨 돌아갔다. 잠을 청한다고 잠이 올 리 없었고 다른 일도 손에 잡힐 리 없었다. 서로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결국 각자 숨어서 옷 속을 뒤지니 바가지가 온데간데없었다. 하도 이상한 일이어서 입이 가벼운 도둑 하나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그때서야 그들은 모두 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던 도적들은 이 모든 것이 혜소국사의 법력임을 깨닫고 국사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일곱 명의 도둑은 모두 깨달음을 얻어 현인이 되었고, 그 현인이 나한이 되어 지금의 나한전에 모셔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 이름이 아미산에서 칠현산(七賢山)으로 바뀌고, 절의 이름도 漆長寺(칠장사)에서 七長寺(칠장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도가에 의해 불타 버린 칠장사의 재건을 시작한 숙종 때의 탄명 스님은 바위 위에서 눈비를 맞고 있던 나한상이 안타까워 나한전을 세워 그 안에 나한들을 모셨다고 한다. 도둑을 나한으로 만든 샘물은 여전히 그곳에서 물을 뿜어 올리고 있다.


나한전에서 내려다보는 사찰 전경이 그만이다. 마음을 크게 먹고 언덕을 내려서니 발이 움직일 때마다 안개 속에서 출렁이는 대웅전의 지붕 선이 감성을 자극한다. 움직이는 지붕 선을 눈으로 잡고 조심조심 언덕을 내려선다
나한전은 600여 년 된 소나무를 우산처럼 쓰고 있다.


나옹송

이 절에는 일곱 나한상의 이야기 말고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그 이야기도 흥미롭다. 홍명희가 쓴 소설 『임꺽정』은 이를 배경에 두고 있다. 임꺽정의 스승으로 알려진 병해대사는 갖바치(가죽신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던 사람)여서 갖바치대사로도 불렸고, 개혁주의자인 조광조와도 친분이 있던 당시의 명사다. 임꺽정은 이곳을 드나들며 병해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병해대사는 이따금 그곳으로 숨어드는 임꺽정과 그 수하들이 깨달음을 얻어 또 한번 일곱 나한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 듯하다. 그러나 전설은 반복되지 않는 법. 병해대사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꺽정은 스승 병해대사가 세상과의 연을 놓고 입적하자 부처를 만들어 공양하는 것으로, 나한이 되기를 바라던 스승의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이것이 '꺽정불'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꺽정불은 종무소 옆 홍제관에 모셔졌는데, 홍제관은 꺽정불뿐 아니라 보물급 문화재 다수가 보관된 칠장사의 보물 창고다. 한때 칠장사는 선조의 계비(繼妃, 왕이 다시 결혼하여 부인이 된 왕비)였던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과 친정아버지 김제남을 위해 기도하던 원찰(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기도 했다. 그가 쓴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七言詩)」가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되어 이곳에 모셔져 있다. 영창대군과 친정아버지를 잃고 자신조차 위태로운 처지가 되어 칠장사에 머물며 쓴 것으로 추정된다. 삶이 가지는 고단함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조차 모두 부질없이 느껴진다. 칠언시를 옮겨 적는다.

老牛用力已多年(노우용력이다년) 領破皮穿只愛眠(영파피천지애면)
犁耙已休春雨足(려파이휴춘우족) 主人何苦又加鞭(주인하고우가편)
늙은 소 힘쓰기는 이미 여러 해 되어 상처 난 몸뚱이는 그저 쉬고 싶을 뿐인데
밭 고르기 끝나고 봄비도 풍족한데 어찌해 주인께선 채찍질 또 해 대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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