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보국을 기원한 간송의 집념으로 되찾은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일반적으로 문화재나 미술품을 수집하는 목적을 보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문화보국을 기원한 간송의 집념으로 되찾은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일반적으로 문화재나 미술품을 수집하는 목적을 보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호기심에 의한 것이다. 일반 개인은 물론 17세기 이후 유럽의 부호나 왕실에서 이슬람과 인도, 중국, 일본 등의 유물을 타 민족에 대한 호기심에서 수집한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다음은 미술품을 재화로 여기고 투자의 대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오늘날 옥션이나 골동품 상가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매매 행위가 그것이다.


다음은 자신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혹은 사적 공간에 독점 수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나 집단에 의한 비합법적이고 강압적인 약탈이나 강탈을 들 수 있다.


끝으로 이와 반대로 약탈당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무조건적인 수집을 한 경우도 있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예가 그렇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지켜낸 간송이 수집한 다양한 문화유산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독특한 상형기술이 엿보이는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을 꼽을 수 있다.


01.사실감 있게 표현된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문화재청



고려 도공의 섬세한 성형 솜씨를 담은 작품

간송은 1906년 장안 갑부로 태어나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지만 독립운동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을 만나면서 우리 문화재 수집을 통해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 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37년 간송은 영국인 수집가 존 개스비가 일본에서 수집, 소장하던 고려청자 20점을 40만 원, 당시 서울의 기와집 400채를 사들일 수 있는 금액을 지불하고 사들였다. ‘개스비 콜렉션’으로 불리는 20점의 작품 중 9점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는데 새끼를 품은 어미 원숭이를 형상화한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국보 연적도 이에 포함된다.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양 다리를 구부려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원숭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어미는 삼분의 일 정도 크기의 새끼의 등과 엉덩이를 기다란 양손으로 감싸 안고 있다. 새끼의 배와 허리는 어미와 접착되어 둘은 하나의 몸체를 이루고 있다. 어미 원숭이의 머리 위와 새끼 원숭이의 머리에는 작은 구멍이 각각 뚫려있어 그 용도가 연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모자 원숭이의 몸체는 형틀이 아니라 하나의 점토 덩어리를 외부에서 조각하여 형상화한 후 속을 파내는 방법으로 성형하였다. 어미 몸체와 머리, 새끼의 몸체를 하나로 성형한 후 몸체와 사이에 공간이 있는 각각의 양팔은 별도로 성형하여 접착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어미와 새끼 원숭이의 포즈는 상당히 사실적이다. 어미 원숭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여 고개를 든 새끼의 눈을 다정하게 응시하고 있다. 어미의 눈과 코, 새끼의 눈은 흑색의 철채로 채색되었다. 새끼는 가느다란 왼팔을 뻗어 어미의 가슴에 대고 오른 손은 위로 길게 뻗어 어미의 얼굴에 갖다 대어 마치 칭얼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미 원숭이의 이목구비는 진짜 원숭이처럼 사실감 있게 조각하였다. 툭 튀어나와 옆으로 길게 다문 입과 위로 치솟은 커다란 귀, 움푹 들어간 눈동자와 오뚝한 코까지 고려 도공의 성형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통통한 몸매와 다리, 기다란 손가락과 발가락도 마찬가지다. 새끼의 경우 몸체와 머리의 비율이나 전체적인 양감은 어미에 비해 쳐지지만 머리와 어미를 응시하는 눈동자 처리는 매우 실감나게 마감되었다. 또한 몸체는 균열이 없고 잔잔한 기포가 있는 맑은 회청색(灰靑色)에 가까운 비색(翡色) 유약을 시유하였고, 바닥은 시유하지 않았다. 소성(燒成) 시에는 어미 원숭이의 엉덩이에 4개, 양 발에 1개씩의 내화토(耐火土) 흔적이 있어 이를 받쳐 구운 것을 알 수 있다. 어미 원숭이의 등에 가로로 약간의 균열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파손 없이 잘 보존되어 뛰어난 작풍을 보인다.

02.수려한 고려청자의 백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문화재청

03.보존상태가 우수해 손상이 거의 없는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문화재청



종교적 길상적 의미를 담은 매력적인 고려청자

이 연적의 모델인 원숭이는 삼국시대부터 원숭이 모양의 토우나 원숭이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무장 형상의 십이지상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12세기 도교가 크게 유행하면서 고려청자에도 원숭이가 석류와 결합하여 장수를 상징하거나, 원숭이 자체가 원숭이가 서식하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도교를 상징하는 소재로도 제작 되었다.

종교적인 의미 이외에도 원숭이를 뜻하는 한자인 ‘후(猴)’와 제후의 ‘후(候)’가 중국어 발음이 같은 데서 ‘배배봉후(輩輩封侯, 대대로 고관대작이 된다)’ 즉, 대를 이어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라는 길상적 의미가 덧붙여진다.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역시 모자(母子) 원숭이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의 제작 시기는 비색 유색과 조형 등을 고려할 때 고려청자의 제작 기술이 최고조에 오른 12세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먼저 비색은 북송의 사신(使臣) 서긍(徐兢)이 1123년 고려를 한 달간 방문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본국으로 돌아가 작성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당시 고려청자의 뛰어난 색상을 빗대어 비색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

서긍은 고려청자의 비색 색상과 상형청자에 대해 극찬을 하였는데 서긍이 당시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을 보았다면 그 색상과 예술성에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고려 인종(仁宗, 1109~1146)의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와 이 연적의 유색이나 번조법 등이 유사한 점도 제작 시기를 12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하게 한다. 장릉에서 출토된 국보 청자과형병(靑磁瓜形甁)은 고려 비색청자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유색과 완벽한 비례미의 조화로 12세기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병과 유사한 과형병 편(片)이 강진 대구면 사당리에서 발견되어 제작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주며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역시 이곳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고려청자 중에서도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빙렬 없는 깨끗한 비색, 사물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간략하게 표현한 디자인에서 고려 비색청자의 뛰어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오직 문화보국의 일념으로 문화재 수집에 매진한 간송 선생의 집념과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다. 출처/(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 한국미술사학회장)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