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일생의례 관혼상제 3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마다 치러야 하는 대표적인 의례로
출생부터 관례, 혼례, 환갑/회혼례, 상장례, 제례를 일컫는 관혼상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인의 일생의례 관혼상제 3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마다 치러야 하는 대표적인 의례로
출생부터 관례, 혼례, 환갑/회혼례, 상장례, 제례를 일컫는 관혼상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혼례에 관하여

시대별 혼례의 변화


우리나라의 혼례의 조선시대에는 사회통치이념인 성리학의 영향으로 혼례에 많은 절차와 제한이 있었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혼례식은 사모관대를 차려 입은 신랑과 족두리에 원삼을 입은 신부가 서로 절을 하면서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이런 전통적인 유교식 혼례를 구식 혼인이라 부르고 교회에서 하는 기독교식 혼례가 유행하였다.

제약이 많았던 조선시대의 혼인풍속

조선시대에는 혼례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 계급과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다양한 제한이 있었다. 왕실은 사대부 이하의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고, 양반은 천민과 결혼할 수 없었다. 또 조혼 풍습을 막기 위해 나이에 대한 제한이 생겨났다. 재혼이나 이혼의 경우, 칠거지악과 자녀안 등 여성 차별적인 규정이 심했다. 남성은 쉽게 이혼하고 재혼할 수 있었으나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이씨(李氏)가 27대에 걸쳐 집권했던 시기이다. 성리학을 사회지도이념으로 삼았으며 숭유억불 정책을 폈고, 이에 따라 혼인 풍습도 변화하였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혼인식'으로 신랑이 혼인식을 하러 신부 집으로 가는 장면

신라와 고려에서 행해지던 동성혼과 근친혼은 법적으로 금지하고, 남녀가 중매자 없이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아서는 안되며, 폐백을 주고받지 않으면 친교를 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동성혼은 물론이고 김해 김씨와 허씨, 연안 차씨와 문화 류씨와 같이 조상이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도 인정하지 않았다. 혼인 절차도 까다로워져 육례(전통사회에서 행하던 혼인절차의 여섯 가지 의식(儀式).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의과정)의 절차와 의식을 엄격하게 했다. 이렇듯 조선시대 혼인의 가장 큰 특징은 제한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한은 나이와 대상, 절차의 제한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계급에 따른 대상의 제한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왕실혼례이다. 『경국대전』에서 왕실의 혼인 대상 신분을 사대부로 한정하였다. 왕실의 혼인에는 간택이라는 특별한 제도가 있었다. 간택령이 내려지면 사대부 집안에서는 아버지의 이름과 규수들의 이름과 나이를 적은 단자를 궁중에 들고 들어가 선고받는다. 이 과정을 초간택이라고 한다. 초간택을 통과한 규수들은 재간택, 삼간택 등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선정되었다. 간택 기간에는 금혼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백성들은 불편했던 제도이다. 양반의 경우에도 천민과의 혼인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아 천민과 양가집 딸이 혼인해 처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남녀가 뒤바뀌어 천한 계급의 여자가 양인에게 시집가는 경우에 대해서는 법이 구체적이지 않아 공사의 노비들이 자기 자식을 양인으로 만들고자 자식의 아비가 양인이라고 우기는 일이 생겨났다. 따라서 천인은 어미를 따른다는 규정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나이의 제한이다. 조선시대에는 일찍 결혼하는 조혼과 늦게 결혼하는 만혼의 폐해를 막기 위해 혼인하는 나이의 제한을 두었다. 조혼은 고려시대에 처녀를 몽골에 바치는 공녀제도를 피하기 위해 딸을 일찍 시집보낸 데서 비롯되었다. 제사를 모시는 후손을 빨리 얻기 위함도 있었다. 민간에서는 장가나 시집을 가지 못한 처녀, 총각이 죽으면 저승에 가지 못하고 손각시와 몽달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돌며 가족들을 괴롭힌다고 여겼던 것도 혼인을 서두른 이유 중에 하나였다. 본래 풍습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시대가 됐어도 조혼이 계속되자 혼인할 수 있는 나이를 정하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게 되었다. 유학을 중시하던 조선이었기에 주자가례에 기준을 두고 남자는 16세부터 30세, 여자는 14세부터 20세가 혼인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경국대전』에는 남자나이 15세, 여자나이 13세가 되면 의혼하여 14세가 되면 혼인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 사람의 평균 수명은 35세였다. 수명이 길지 못했던 시기에 손자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 조혼풍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7년에는 부모의 나이가 50세 이상이거나 병 든 경우에는 10세 이상이면 성혼을 할 수 있게 했다가 5년 후에는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혼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이의 제한은 상한선도 있었다. 혼인 적령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적령기를 놓치고 늦게 결혼하는 것을 만혼이라고 하는데 만혼의 원인으로 첫번째, 혼인의 사치 풍조로 인해 가난한 양반가문에서 체면이 상할 것을 두려워하여 혼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고, 둘째, 부모가 한꺼번에 돌아가신 경우 욕심 많은 일족이 재산을 탐내어 늦추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경국대전』 예전 혼인조에 의하면 혼기를 넘긴 가는 엄격히 조사하여 호조와 영문 및 각 읍에서 돕도록 법으로 제정하였다. 형편이 어려운 경우 관에 고하여 혼례비용을 보조할 수 있도록 했다. 나라에서 보조를 해주면서까지 만혼을 억제했던 이유는 천지이변의 재앙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추측된다. 남자와 여자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인수대비(1437 ~ 1504)가 지은 최초의 여성교육서 내훈
조선시대 혼인 풍습 중 가장 큰 특징은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춰진 이혼과 재혼 풍습이다. ‘칠거지악’이라는 관습으로 일방적으로 여성에게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은 『大戴禮記(대대례기)』에 나오는 말로 아내를 내쫓는 일곱가지 조건이다. 不順(불순), 誣告(무고), 無子(무자), 淫行(음행), 嫉妬(질투), 惡疾(악질), 口舌(구설), 竊盜(절도)가 칠거지악에 속한다. 不順(불순)은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誣告(무고)는 있지도 않은 것을 거짓으로 일러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無子(무자)는 말그대로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제사를 지낼 자손을 이어주는 것이 여성의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淫行(음행)은 부정하고 음란한 행동이고, 嫉妬(질투)는 시기심이 많고 질투를 부리는 경우를 뜻한다. 惡疾(악질)은 전염병이나 불치병에 걸렸을 경우를 의미한다. 口舌(구설)은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많은 말로 인해 구설수에 자주 오르는 사람을 의미하고, 竊盜(절도)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경우이다. 아내가 이 경우에 속했을 때, 일방적으로 쫓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칠거지악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내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三不去(삼불거)’라고 하는데 부모들이 그 며느리를 사랑하는 경우는 내쫓지 않는다. 여성이 처음 시집을 올 때는 몹시 어렵게 살다가 뒤에 부자가 되거나 지위가 높아졌을 경우에도 내치지 못하고, 돌아갈 곳이 없는 여자를 함부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이혼에 대한 사유와 절차는 모두 남성에게 있었다.

여성의 재혼은 금지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법을 이어받아 남편이 사망한 후 3년 동안만 재가를 불허했다. 그러나 태종 6년에 인륜과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명분으로 세 번 시집간 여자는 자녀안(恣女案)양반가문의 여자로서 품행이 나쁘거나 세 번 시집가서 양반의 체면을 손상시킨 여자의 경력을 적어 두었던 문서)에 기록하도록 했다. 자녀안에 기록된 여성의 가문은 불명예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손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벼슬길에도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여인의 재가를 부끄러워하고 멸시하는 풍속이 생겨났고 성종 8년에는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법이 채택되었다.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조선시대에는 혼례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 계급과 나이에 대한 제한이 있었고 이것이 법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재혼이나 이혼의 경우에도 일방적으로 남성의 권리로만 작용했다


일제강점기의 혼인풍속

일제강점기에는 유교식 혼례를 구식혼인이라 하여 기피하고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올리는 신식혼인을 선호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의 대부분이 비기독교인이다.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하여 새로운 형태의 혼례를 모색하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계명구락부식이다. 이 양식은 사회식 혼인을 대표한다. 일제강점기에 피로연과 신혼여행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혼례식은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신랑과 족두리를 쓰고 원삼을 입은 신부가 서로 절을 하면서 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다. 이런 전통적인 유교식 혼례를 구식혼인이라 불렀다. 본래부터 전통혼례가 구식혼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혼례가 들어오면서 그것을 신식혼인이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식혼인은 경제적인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기피하고 대신 간편하고 경제적인 신식혼인을 선호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신식혼인은 1880년대 후반부터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 1888년 3월에 정동교회에서 아펜젤러가 감리교 신자의 주례를 맡아 혼례를 이끈다. 이때 신랑은 사모관대를 하고 신부는 족두리에 활옷을 입고 얼굴에는 연지곤지를 찍었다. 그리고 1892년 가을에는 이화학당의 학생인 황몌례와 배재학당 황 씨가 기독교식으로 혼례를 올린다. 신랑은 프록코드에 예모를 쓰고 신부는 한복에 면사포를 썼다. 초창기에 거행된 신식혼인은 교회에게 기독교식으로 진행된 ‘예배당 혼인’을 말하는 것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 ‘예배당 혼인’을 치른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보다 비기독교인인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부터 비기독교인이 교회식으로 혼례를 치르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꾸준히 새로운 혼례 방식을 모색한다. 그래서 제정된 것이 계명구락부식 예식 절차이다. 계명구락부식은 박승빈이 창안한 것으로, 예식 절차는 "1. 친척 및 내빈 착석, 2. 개식사, 3. 신랑·신부 입장, 4. 신랑·신부 경례, 5. 고천문 낭독, 6. 예물 증정, 7. 혼인 완성 고함, 8. 내빈축사, 9. 신랑·신부 경례, 10. 신랑·신부 퇴장, 11. 친척 상견례" 순으로 진행된다. 결혼식 장소는 ‘공회당, 부민관, 동아조선 신문사 강당, 요릿집’ 등이었다. 계명구락부식 혼례는 1930년대에 이르면 나름 사회적 혼례로 자리를 잡아간다. 1920년대 후반까지 사회식 혼례에서 주례자는 친구나 선배가 서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192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주례가 예식을 진행하는 사회자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망 있는 사람이 주례자로 선정되면서 오늘날과 매한가지로 혼례식에서 주례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오늘날과 같은 예식장에서 혼례식을 치르는 것은 1930년대 후반이다. 1940년대 4월 5일 『동아일보』에 의하면, 서울에는 문명 예식부를 비롯해 10여 개의 예식부가 성업 중이라고 한다. 예식부 자체보다는 예식부가 꾸며 놓은 결혼식장이 아름답다고 하여 당시 성업 중인 예식부가 오늘날의 예식장과 같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통혼례에서 예식이 끝나고 거행되던 혼인잔치가 피로연으로 대체된다. 피로연은 일본에서 들어온 문화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에 신도식 결혼이 유행하면서 친구와 친지 앞에서 혼인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는 과정의 하나인 피로연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혼식장에는 양가의 가족들이 참석하지만, 피로연장에는 초대를 받은 사람만이 참석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피로연이 혼인잔치의 별칭에 불과하여,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피로연에 참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늘날 신혼여행은 혼례식의 마지막 절차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신혼여행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 전통혼례에는 없는 절차이다. 1920년대의 신문과 잡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이 당시에는 신혼여행이 보편적인 현상을 아니었으며 필요에 의해 일부 사람들이 다녀오는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신혼여행이 보편화된 것은 1970년대 예식장 혼인이 일반화되면서부터이다.


전통혼례의 절차

혼례는 ‘인륜지대사’라고 부르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이다. 그래서 혼례는 가장 큰 경사로 신랑과 신부가 부부가 되는 것을 알리는 중요한 의례였다. 혼례의식은 크게 중대한 예식이라는 의미로 대례(大禮)라고 하는데, 좁은 의미로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얼굴을 보고 절을하는 교배례와 잔을 주고받는 합근례를 뜻하고, 넓게는 신붓집에서 진해되는 혼례의 모든 절차를 말하기도 한다.


나무기러기를 전하는 혼례의 첫 순서, 전안례
혼례의 가장 첫 의식으로 신랑이 신부 부모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을 전안례라 한다. 일반적으로 신부 어머니가 기러기를 받으나 지역마다 차이가 나타난다. 조선 초기에는 진짜 살아있는 기러기를 사용했을 것이나 구하기 어려워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기러기는 한번 짝을 맺으면 짝이 죽더라도 다른 짝을 맺지 않기 때문에, 기러기처럼 평생을 사랑하고 다복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기러기를 전한다.

전안례는 혼례식에서 가장 처음 이루어지는 의례로 ‘기러기를 전하는 의례’라는 뜻이다. 신랑은 결혼식 당일, 자신의 집에서 상객, 후행 등으로 이루어진 행렬과 함께 신붓집에 간다. 이것을 ‘초행’이라고 한다. 신랑 일행은 신부네 마을에 도착하면 신부 측이 지정한 ‘중반’ 또는 ‘정방’에서 머문다. 이를 ‘사처방’이라고도 한다. 신붓집에서는 ‘맞음’·‘신랑 대반’이라 불리는 사람이 신랑 일행을 맞이한다. 신랑 대반은 일반적으로 신부의 오빠나 삼촌 등이 맡는다. 이곳에서 신랑 행렬은 신붓집에 가기 전에 짐을 풀고 음식을 먹는다.

신붓집에서는 대문 안쪽에 멍석을 깔고 병풍을 치고 그 앞에 작은 상을 놓고 상을 붉은 보자기로 덮어둔다. 이 상을 ‘전안상’이라고 부르며, 전안상을 포함하여 전안례를 위한 멍석을 깐 공간을 ‘전안청’이라고 한다.

신랑이 신붓집에 도착하면 바로 전안청으로 향한다. 전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럭아비에게서 나무 기러기인 목안을 받는다. 신랑이 목안을 상 위에 올려놓고 읍을 하고, 일어서서 큰절을 두 번 한다. 절을 하는 사이에 신부의 어머니가 기러기를 치마로 받아들고 신부가 있는 안방에 던진다. 던졌을 때 기러기가 누우면 첫딸을 낳고, 일어서면 첫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목안은 시루에 넣어두거나 신부의 방 아랫목에 두었다가 신랑 후행이 돌아갈 때 함께 보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전안례를 할 때 진짜 살아있는 기러기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기러기를 구하기 어려워진 탓에 서민들은 나무로 기러기를 조각하여 혼례에 사용했다. 혼례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기러기는 생태학적으로 한번 짝을 맺으면 짝이 먼저 죽어도 다시 다른 짝을 맺지 않는다. 따라서 평생 한 번만 짝을 맺는 기러기처럼 평생을 사랑하고 다복하게 살라는 뜻으로 전안례를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기러기는 겨울에 남쪽으로 날고 봄에는 북쪽으로 날아간다. 기러기의 음양에 순응하는 습성처럼 음양에 따라 양인 남자와 음인 여자가 마음을 합하여 하나가 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는 해석도 있다.

전안례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서는 신랑이 초행을 가기 전에 조상에게 고사를 먼저 지낸다. 물 세 그릇을 올리고 절을 하고 자신의 혼례를 조상님께 알린 후 신부의 집으로 간다. 충청북도에서는 나무기러기를 상에 올려놓고 북쪽으로 두번 절한다. 기러기는 신부 어머니가 받지만 때로는 혼주인 신랑 아버지나 깨끗한 남자가 받기도 한다. 강원도 정선에서는 신부 아버지가 신랑에게서 나무기러기를 받고 절을 2번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신부에게 기러기를 전하면 신부가 나와 2번 절하는 것으로 답한다.

전라북도 중부지역에서는 신랑이 기러기를 상에 올리고 북쪽을 향해 4번 절을 한다. 절을 하는 동안에 신부 어머니가 치마로 기러기를 받아서 안방으로 가져간다. 전라남도 강진에서는 신랑이 대반의 안내로 전안청 앞에 서고, 기러기를 중방이 가지고 오면 신랑이 받아들고, 전안상 가운데에 놓는다. 상 위에는 정화수와 쌀이 한 사발 같이 올라간다. 기러기를 놓고 일어서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한다. 이 지역은 기러기를 오리로 통칭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오리로 표현되는 경우가 나타난다.

전라북도 순창에서는 전안례를 제일 중요한 의례라고 한다. 신랑이 신붓집 앞에 와서 말에서 내리면 ‘팔머리대반’이 신랑을 맞아서 세 번 읍하면, 신랑도 답례로 세 번 읍하고 전안상인 안상으로 안내를 받는다. 신랑 앞에 기러기를 주면 신랑이 받아서 안상에 올리고 진삼배(進三拜) 퇴삼배(退三拜)를 한다. 이때 신붓집 유모가 기러기를 안아다가 신부 앞에 놓는다.



신랑과 신부가 처음 얼굴을 보고 절을 올리는 교배례


혼례 중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절을 주고받는 의식을 교배례라고 한다. 혼례 과정 중 처음으로 신랑과 신부가 얼굴을 보는 순간이다. 교배례는 신붓집에 마련되는 초례청에서 진행된다. 초례청에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대례상이 차려지는데 올라가는 음식과 물품이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절은 두 차례에 걸쳐 신랑 먼저, 신부 다음 순서로 하는데, 절의 횟수도 지역마다 다르다. 교배례는 현대에 와서 예식장에서 신랑 신부 맞절로 바뀌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얼굴을 모르고 혼인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진행되던 혼례 중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의례가 바로 교배례이다. 교배례는 신부집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 절을 주고받는 의식으로 친영의 한 절차이다. 현재에도 전통혼례에서 행해지고 있다.

교배례는 대례의 한 과정으로 일반적으로 신붓집에서 진행된다. 신붓집에는 마루나 마당에 초례청이 세워진다. 초례청에 대례상이 차려지는데, 보통 발이 높은 고족상을 차린다. 혼례용 고족상은 다른 용도와 구분하기 위해 붉은색으로 칠한다. 일반적으로 송죽(松竹)이나 사철나무를 꽂은 꽃병·밤과 함께 대추, 쌀, 청홍실, 하나의 표주박을 갈라 만든 표주박 잔이 올라간다. 송죽이나 사철나무는 1800년대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굳은 절개를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밤과 대추는 장수와 다남(多男)을 뜻하며 반드시 올린다. 청색과 홍색의 촛대 한 쌍을 양쪽에 올리고, 청홍색 보자기에 싼 살아있는 한 쌍의 닭은 남북으로 갈라놓는다.

전라남도 나주에는 초례청을 안마당에 차린다. 대례상차림은 1800년대 말에 보이던 대례상 차림을 계승한 것으로 동쪽에 살아있는 수탉, 서쪽에는 살아있는 암탉을 상에 올린다. 그리고 청주를 담은 술병 2기, 대추 1기, 정화수 1기, 밤 1기, 합근을 올린다. 상 중앙의 양 끝에는 곡식을 측량하는 말(斗)에 면화씨를 가득 담아놓고 여기에 사철나무, 대나무, 동백나무를 꺾어 꽂고는 종이꽃을 만들어서 단지에 꽂아서 장식한다. 반면에 강원도 정선에서는 대례상에 밤, 대추, 용떡, 메주콩, 살아있는 닭 한 쌍이 올라간다. 이처럼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대례상을 가운데 두고 동쪽과 서쪽에는 돗자리를 펴고 물 대야와 수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가운데 홀기를 읽어주는 사람의 진행에 따라 식이 진행된다. 신랑을 도와주는 시자(侍字)는 붉은 초에, 신부를 도와주는 시자는 푸른초에 불을 밝힌다. 최근에는 신랑・신부의 어머니가 홍초와 청초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신랑은 대례상의 동쪽에 있는 대야에서, 신부는 대례상의 서쪽에 있는 대야에 담겨있는 물로 각자 손을 씻는다. 신랑이 신부를 향하여 읍하면 신부는 답례로 신랑에게 읍한다. 신랑은 대례상의 동쪽으로, 신부는 서쪽으로 마주 보고 선다. 신부가 먼저 재배하면 신랑이 그에 답하여 한 번 절한다. 신부가 다시 재배하고, 신랑도 다시 한번 절한다. 절의 횟수에 차이가 나는 것을 남존여비(男尊女卑)로 보기도 하지만, 음양이 홀수와 짝수이기에 그 이치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절차는 거의 일반적으로 동일하나 절하는 횟수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경기도 화성시에서는 신부가 세 번 절하면 신랑은 재배하고 반 절한다. 경상남도와 부산광역시에서는 신부가 4번 절을 하면 신랑은 재배한다. 전라북도 순창 지방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절 횟수는 일반적이지만, 한 차례만 절한다. 이러한 교배례 절차가 최근에는 '신랑・신부 맞절'로 바뀌어, 선 채로 서로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신랑과 신부가 한 술잔을 나누는 합근례
대례의 한 절차로 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받는 의식을 의미한다. 술을 주고 받을 때는 하나의 표주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사용하며 도우미인 시자들을 통해서 주고 받는다. 합근례까지 마치면 대례가 끝난다. 지역에 따라서 술을 주고받는 방식이나 횟수 등의 차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근’은 하나의 박을 갈라서 두 개의 바가지로 만든 것이다. 신랑과 신부가 근을 하나씩 들고 서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합근’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합근례는 남녀가 하나의 표주박으로 만든 잔을 들고 술을 주고받는 의식이다.

합근례는 교배례가 끝난 후에 진행된다. 교배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자리에 꿇어앉는다. 신랑과 신부의 도우미인 시자(侍者)들은 표주박으로 만든 술잔과 과일 접시를 작은 상으로 옮긴다. 신랑 상에는 밤이 올라가고 신부상에는 대추가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랑과 신부의 양쪽에 서 있는 시자 중에 왼편에 서 있는 사람은 받침잔에 올려서 잔을 주는 역할을 하고, 오른편에 선 사람이 술을 따른다. 신랑과 신부는 잔을 받아서 눈높이로 올렸다가 내리고 빈 그릇에 붓는다. 왼쪽 시자가 잔을 상 위에 놓고, 신랑 신부는 과일 안주를 집어 상 위에 올린다. 신부의 오른쪽에 있는 시자는 대나무 가지의 청실을, 신랑의 오른쪽에 있는 시자는 대례상에 놓인 소나무 가지의 홍실을 손목에 걸친다. 이는 잔을 교환할 때 신랑의 시자인지 신부의 시자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신랑과 신부 시자들은 술을 따른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배우자 서약을 하는 의미를 담아 잔을 가슴 높이까지 받들어 올렸다가 술을 반쯤 마신다. 그리고는 술잔을 각자의 오른쪽 시자에게 준다. 술잔을 받은 시자는 각각 일어나 오른쪽으로 돌아서 상대편 왼쪽 시자에게 준다. 왼쪽 시자는 잔을 받아 각각 신랑과 신부에게 전달한다. 신랑과 신부는 배우자 서약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처음 술을 먹을 때와 동일하게 잔을 가슴 높이까지 올렸다가 남은 술을 마신다. 빈 잔을 왼쪽 시자에게 주면 상대편 오른쪽 시자에게 준다. 잔을 받은 오른쪽 시자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원래 자리에 잔을 놓고, 받침잔에 있는 술잔을 왼쪽 시자가 내리면 오른쪽 시자는 대례상에 놓인 표주박잔을 올려놓는다. 왼쪽 시자에게 받침잔을 받은 신랑・신부는 오른쪽 시자에게 술을 받는다. 신랑이 함께 마시자는 의미로 신부를 향하여 읍하고 표주박잔을 들어 마신다. 그러면 신부도 따라 마신다. 오른쪽 시자는 표주박잔을 대례상 위에 합하여 각각 청실과 홍실을 다시 원래 자리에 놓는다. 신부와 신랑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신랑이 먼저 신부를 향해 읍하면, 신부는 그에 대해 허리를 굽혀 답한다. 합근례까지 마치면 대례의 절차가 끝이 나는 것이다.

합근례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첫째 잔과 둘째 잔은 신부와 신랑이 마시지 않고 잔에 입을 대기만 하고 퇴줏그릇에 붓는다. 마지막 셋째 잔만 서로 마신다. 반면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첫째 잔은 신랑이 입에 대었다가 신부에게 주고, 신부가 입에 대었다가 신랑에게 주면 받아서 퇴줏그릇에 붓는다. 둘째 잔과 셋째 잔은 첫째 잔과 같이한 후 퇴줏그릇에 따르지 않고 마신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표주박잔에 따른 술잔만을 교환한다. 먼저 신부의 시자가 표주박잔에 술을 따라서 신부에게 준다. 술잔을 받은 신부는 입을 대었다가 시자에게 전달한다. 신부의 시자가 상 위에 걸쳐놓은 술잔을 청홍색실 위로 통과를 시켜서 신랑의 시자에게 갖다 준다. 신랑의 시자에게 술잔을 전달받은 신랑이 받아 마시면, 신랑의 시자가 술을 표주박잔에 따라 신랑에게 다시 준다. 그러면 신랑은 술을 조금 마시고 다시 시자에게 준다. 신랑 시자가 술잔을 신부의 시자와 동일하게 청홍색실을 통과시켜서 신부의 시자에게 전달한다. 술잔을 받은 신부가 마신다. 신부가 마시지 않고 입만 대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지역적인 차이가 나타나지만 모두 술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표주박잔을 합친다는 의미의 ‘합근’은 신랑과 신부가 몸을 합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제주도의 독특한 혼례

“씨집 장게 안 강 살민 저승 강 망데기 쓴다“ 혼사를 치르지 못하고 죽은 처녀 총각은, 저승가면 인간 본연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로 벌을 받는다는 제주도의 속담이다. 문중 조직이 발달하지 않았던 제주도에서는 혼인의례보다 잔치가 더 중심적이었다. 따라서 혼례는 친인척이 함께 어우러지는 잔치이자 마을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동네잔치이기도 했다.

일주일동안 이루어지는 일뤠잔치

제주도에서는 혼례를 ‘일뤠잔치’ 혹은 ‘이레잔치’라고도 한다. 제주도 지역 혼례의 특징으로 풀이하면 일주일에 걸칠 정도로 잔치가 여러 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혼례를 치루는 과정에서 잔치는 결혼식 전날 준비를 하면서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가문잔치’, 결혼식 날 신랑네 집과 신부네 집에서 열리는 ‘잔치’, 결혼식 다음 날 신부 집의 ‘사돈잔치’, 그 다음 날 신랑 집의 ‘사돈잔치’가 있다. 이렇듯 나흘에 걸쳐서 양가에서 세 번씩 모두 여섯 번의 잔치를 한다.


결혼식을 공동체 잔치로 여겼던 제주의 혼인 풍습

제주도의 혼례 풍속은 의례보다 잔치가 더 중심적이었다. 제주도에서는 문중 조직이 발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혼례는 친인척이 함께 어우러지는 잔치였다. 동시에 내혼으로 형성된 마을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동네잔치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혼인은 개인 혹은 어느 한 집안에만 한정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가, 여성의 참여가 활발하였다는 점은 내륙과는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의 혼례는 내륙과는 다르게 ‘잔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결혼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결혼식 전날 양가 친척들이 모이는 ‘가문잔치’, 결혼식 당일 양쪽 집안에서 각각 치르는 ‘잔치’, 결혼식 다음 날 신붓집에서 치뤄지는 ‘사돈잔치’, 그 다음 날 신랑 집에서 치뤄지는 ‘사돈잔치’가 있다. 이렇듯 결혼식은 일반적으로 3일이 걸리고, 준비와 잔치 후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까지 길게는 7일이 걸린다. 그래서 결혼식을 일뤠잔치 혹은 이레잔치라고도 부른다.

잔치는 음식준비부터 시작한다. 혼례 하루나 이틀 전 돗(돼지)을 잡는다. 친척이나 이웃이 혼인을 하면 ‘돗 잡는 날’에 참석하여 술 한 잔 나누는 것을 일종의 부조로 생각했다. 돗 잡는 날, 음식을 준비하고 천막을 치는 등 결혼식 준비를 마치고 나면 저녁때쯤 가문잔치를 한다. 가문잔치는 신랑과 신붓집에서 따로 이루어진다. 가문잔치는 궨당(친인척을 의미하는 말)끼리 모여 앉아 사돈집에 참석할 우시(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상객을 지칭하는 말). 대반, 중방 등을 결정한다. 제주도는 마을내혼이 많았기 때문에 친가와 외가가 한 마을에 살거나 인근 마을에서 거주해 집안의 큰일에 함께 참여했다.

혼인 당일 아침에는 문전제와 조상제사를 지낸다. 문전제는 집안을 지켜주는 가택신 중에서 주신인 문전신에게 고하는 의례로, 절을 올리고 잡식(상에 진설된 음식을 술잔에 모두 조금씩 떼어놓는 것)한 후에 ‘걸맹’(걸명이라고도 함. 잡식한 것을 올래인 대문간 쪽에 뿌리는 것)을 한다. 문전제를 지내고 나서는 방 안에 차려진 제사상 앞에서 집안에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는 것을 조상에게 알리는 제사를 지낸다. 민간신앙과 유교의식의 혼합인 이 절차는 현재도 대부분의 제주도 지역에서 시행한다.

신랑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가는 일행은 우시 2~4명, 마을 하인(마을의 궂은일을 맡아 하는 동네 하인), 하님(마을 하인의 처)등으로 구성된다. 신랑을 데리고 가는 상객을 우시라고 한다. 이 역할은 삼촌이나 당숙 같은 근친 한 명, 외사촌 형이나 외삼촌 같은 외펜궨당 한 명이 선정된다. 여성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며, 여성 우시는 비교적 젊은 숙모, 이모나 고모 또는 신랑의 누나 중에 정해진다. 신랑과 궨당들이 신붓집에 도착하면 먼저 홍세함을 전달하고, 예장 검열을 한다. 신부의 아버지가 예장을 읽어보고 신부 측 어른들에게 보인다. 어른들이 보시고 만약 문제가 있으면 정중하게 거절하고, 그 때는 신랑이 말 위에 앉은 채로 예장을 다시 써야 한다. 예장 서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 받아들인다. 제주도의 혼례 과정 중에서 양쪽 집안에서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이 바로 이 예장 접수이다. 제주 혼례에서는 대례의 과정이 없기 때문에 예장은 성혼선언과 비슷한 기능을 지닌다. 극히 일부에서 ‘올리친심’ 또는 ‘올히친심’, ‘오리친심’이라는 간소화된 대례 과정이 있었지만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예장이 접수되고 신붓집에서 문전고사를 마쳐야 신랑과 우시는 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신랑과 우시들이 식사를 마치면 마루로 나와 사돈열맹을 치룬다. 사돈열맹은 신랑 쪽 가족과 신부 쪽 가족이 함께 인사를 나누는 행사다. 사돈열맹은 신붓집과 신랑집 양측에서 한번씩 진행한다. 사돈열맹을 할 때는 마루 중앙에 주안상을 차리고, 신랑과 신랑 측의 우시, 신부의 부모・조부모・삼촌・고모・외삼촌・이모 등 다수의 남녀 친척으로 구성된 성펜궨당과 외펜궨당들이 소개한 뒤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주고받는다.
혼인 다음 날 아침에는 부부가 된 신랑과 신부가 가까운 친척집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열맹을 한다. 이를 제주도 해안동에서는 올래알림, 골목알림, 문안인사, 조례, 숙기둘레라고도 부른다. 시어머니나 숙모, 시누이, 동서 등이 가까운 친척집을 안내하여 방문하고 인사를 드리고 식사를 함께 한다. 사돈끼리는 신붓집과 신랑집을 서로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는 사돈잔치를 한다. 잔치 다음 날 신혼부부와 신랑의 아버지는 돼지고기, 술 등 음식을 마련하여 신붓집으로 가서 사돈잔치를 한다. 사돈잔치는 ‘두불잔치’라고 하는데, 이는 신랑집과 신부집에서 각각 이루어지므로 두번의 잔치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다.

사돈잔치가 끝나면 신랑 부친과 근친들은 모두 돌아가고 신랑과 신부만 남는다. 신붓집에서도 신혼부부와 함께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밤을 새워 ‘신랑다루기’를 하며 잔치를 즐긴다. 그 다음 날에는 신부의 아버지와 신부쪽 근친들이 함께 신랑 집을 방문한다. 이 사돈잔치까지 마치면 모든 혼인의례가 끝난다.

이런 방식의 제주도의 혼인 관행은 195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1970년대부터는 신식혼례가 정착되었다. 신식혼례가 정착된 뒤에도 집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고 손님맞이를 했으며, 잔치 전날에는 나이가 많은 친척 어른들께는 돼지고기 석 점의 ‘고기반’ 한 접시라도 돌리는 형식으로라도 가문잔치는 전승되었다. 그러나 예식장이 생기면서 최근에는 돗 잡는 일과 가문잔치를 보기 힘들어졌다. 사돈열맹이나 사돈잔치도 혼인식 날 예식장에서 모두 치르는 것으로 변화했다.

제주도에서는 문중 조직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례는 친인척이 함께 어우러지는 잔치이자, 내혼으로 형성된 마을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동네잔치였다. 이 과정에서 외가, 여성의 참여가 활발하였다는 점도 내륙과는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돈열맹

사돈열맹은 신랑과 신부의 친인척이 인사를 나누는 의례를 의미한다. 사돈열맹은 신부집에서 먼저 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신랑집에서도 진행된다. 서로 인사를 하고 간단히 술잔을 주고 받는다. 신랑네 집에서 진행될 때는 신부가 가진상이라는 신부상을 받는다. 이때 신부는 세 숟갈 정도 먹고 상을 물리는 것이 관행이다. 이렇게 남은 음식은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또한, 사돈열맹 후에는 친인척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연다.


사돈끼리 인사를 나누는 제주도의 사돈열맹

사돈열맹은 제주도의 혼인 의례 중 한 과정으로 신랑과 신부의 친인척이 인사를 나누는 의례다. 신붓집에서 먼저 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신랑집에서도 진행된다. 서로 인사를 하고 간단히 술잔을 주고받은 뒤 신랑과 신부는 가진상을 받는다. 이때 신랑과 신부는 몇입만 뜨고 상을 물리는 것이 관행이다. 남은 음식은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 사돈열맹 후에는 친인척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연다.

사돈열맹은 신랑 측과 신부 측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행사를 의미한다. 신랑 쪽 우시들과 신부 쪽 친척들이 모여 인사를 나누고, 사돈을 맺게 된 것을 서로 축하하는 의례이다. 사돈열맹은 신랑과 신부 양측에서 두 번 한다.

사돈열맹은 신붓집에서 먼저 진행한다. 신부네 집 마루 중앙에 주안상을 차리고, 신랑과 신랑과 함께하는 우시, 신부의 부모・조부모・고모・삼촌・이모・외삼촌 등 남녀 친척으로 구성된 성펜궨당(父系親)과 외펜궨당(外戚)이 서로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고 간단하게 술잔을 주고 받는다. 이후 하직인사를 하고 친척들이 돌아가면 신랑이 신랑방으로 들어가 ‘가진상’이라는 식반을 받는다. ‘가진상’은 갖추어진 상이라는 뜻으로, 지역에 따라 도임상, 도림상, 식반, 식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혼인 당일에는 신붓집에서 신랑이, 신랑 집에서는 신부가 받는, 격식을 갖춘 큰 상을 부르는 말이다. 신랑이 ‘ 가진상’을 받으면 밥을 세 숟가락정도 떠서 밥상 밑에 놓는데 이를 ‘코시’라고 한다. 코시를 하는 이유는 잡귀의 범접을 막기 위해서다.

신부 쪽에서 신랑집에 갈 때도 신랑 쪽의 우시와 숫자나 구성을 유사하게 맞춘다. 신랑 일행과 신부의 우시들이 신부를 가마에 태워 신랑네 집에 간다. 신부는 신붓방에서 ‘가진상’을 받는다. 신부가 받는 ‘가진상’은 아무리 무거워도 신부 앞에 놓기 전까지 다른 곳에 내려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가진상을 신부에게 전해주는 사람은 다복한 손윗 동서, 숙모가 일반적이다. 가진상을 받은 신부는 밥 세 숟가락 정도만 먹는 것이 관행이었다. 남은 음식은 구경하고있는 방문 앞의 아이들에게 한 숟가락씩 준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밭농사 중심이었다. 따라서 쌀이 귀해 쌀밥을 곤밥(보리밥에 비해 고운 밥)이라고 불렀는데, 곤밥은 아무때나 먹을 수 없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기에 아이들에게는 신부상의 쌀밥 한 숟가락 얻어먹는 것이 대단한 기쁨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신부 쪽 우시들과 신랑 쪽 근친들은 신붓집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사돈열맹을 한다. 사돈열맹이 끝나면 신부 측 우시들이 떠나기 직전에 신부 부친 혹는 근친 대표가 신부에게 결혼생활에 덕담이 되는 말을 남긴다. 제주도에서는 대체적으로 마을 내혼이었기 때문에 사돈집이 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잔치 당일에 이 절차가 모두 가능했다. 사돈열맹 후에는 신랑집과 신붓집에서는 하루종일 참여한 친인척들과 동네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열린다.

사돈열맹은 혼인 의례가 별도로 없었던 시절, 혼인식에서 중요한 절차였다. 하지만 최근 혼례식이 신식으로 변화하면서 사돈열맹의 과정은 없어지고 있는 추세다. 최근에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식당에서 잔치를 치른다. 따라서 결혼식 당일 신랑 측과 신부 측이 모두 한자리에서 사돈열맹과 사돈잔치를 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돗 잡는 날

제주도에서는 혼례 준비 중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새끼돼지를 키우는 일이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부모가 미리 1~2년 전부터 ‘통시’에서 어린 돼지를 키우며 미리 준비하였다. 여기서 통시는 변소, 즉 화장실을 의미하고, 아기 돼지는 ‘자릿도새기’라고 부른다. 잔치에는 음식이 필요한데 갑자기 준비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리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잘 키워서 혼인날이 되기 이틀 전에 집안 가족들이 모여 돼지를 잡는데, 이날이 바로 돼지를 잡는 일명 ‘돗 잡는 날’이다.

제주도의 혼례를 준비하는 돗 잡는 날

‘돗 잡는 날’은 제주도에서 혼인을 준비하는 날로 쉽게 말하면 ‘돼지 잡는 날’이다. 혼인을 준비하면서 집에서 돼지를 키워 잔치음식을 대비하고, 혼인날이 정해지면 이틀 전에 친척들이 모여 돼지를 잡고 음식을 준비한다. 돗잡는 날은 신랑집과 신부집에서 각각 따로 치렀다. 요즘은 삶은 돼지고기를 사서 진행하는 등 간소해졌다.

제주도의 혼례절차는 '돗 잡는 날 – 가문 잔치날 – 잔치날' 까지 총 사흘에 걸쳐서 진행된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결혼식을 치르려면 3일 잔치를 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제주도에서 혼례 준비 중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새끼돼지를 키우는 일이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1~2년 전부터 미리 준비를 시작한다. 집안에서는 ‘통시’, 즉 변소에서 어린 돼지를 키우며 미리 준비하였다. 아기 돼지는 ‘자릿도새기’라고 불렀다. 잔치에는 음식이 많이 필요한데 갑자기 많은 고기를 준비하기 어려우니까 집안에서 미리 돼지를 키운 것이다. 어린 돼지를 잘 키워서 혼인 이틀 전에 집안 가족들이 모여 돼지를 잡는다. 이 날이 바로 돼지를 잡는 날, 일명 ‘돗 잡는 날’이다.

돗 잡는 날은 혼례에 참석하고 준비를 함께 도와주는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인다. 이 날은 돼지를 잡고, 돼지고기를 삶아 준비하고, 천막을 치는 등 혼례식을 준비한다. 돼지를 잡느라 고생한 남자들에게는 돼지 간과 술을 대접한다. 여자들은 두부를 만들고, 전을 부치는 등 음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결혼식 전 날, 잡은 돼지고기를 먹으며 조촐하게 가족끼리 잔치를 벌인다. 이 잔치를 ‘가믄잔치’ 또는 ‘가문(家門) 잔치’라고 부른다.

돗 잡는 날은 신랑·신부 각각의 집에서 따로 치렀다. 과거에는 혼례 중 가문 잔치의 비중이 높았기에 돗 잡는 날을 소홀히 하면 잔치도 아니라고 흉잡히는 일이었다. 최근에는 집에서 돼지를 키우지도 않고, 양돈장에서 키우는 돼지를 사다가 잡거나 혹은 삶은 돼지고기를 사서 진행하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 또한 일가친척끼리 따로 모여 가문 잔치를 치르는 경우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제주도에서 혼인은 개인이나 어느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친족이나 마을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단결시기키는 기능을 했다. 따라서 돗 잡는 날은 단순히 잔치 음식을 준비하는 날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대소사를 함께 준비하고 맞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솔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신랑집은 청렴함을 의미하는 대나무, 신부집은 일보종사의 삶을 의미하는 소나무로 솔문을 만들었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