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새긴 선비들의 석교石交 김정희 해서 [묵소거사자찬]

행간에 새긴 선비들의 석교石交 김정희 해서 [묵소거사자찬] 1837년경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친우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을 위하여 그의 별호에 대한 자찬의 글인 [묵소거사자찬]을 써주었다.

행간에 새긴 선비들의 석교石交 김정희 해서 [묵소거사자찬]

행간에 새긴 선비들의 석교石交 김정희 해서 [묵소거사자찬] 1837년경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친우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을 위하여 그의 별호에 대한 자찬의 글인 [묵소거사자찬]을 써주었다. ‘묵소’는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웃어야 할 때 웃는다’는 뜻이다. 김유근 문집 『황산유고』 권4에 실려 있는 이 글은 깊은 우정을 나눈 김정희와 김유근의 소통의 기록이다.


김정희 해서 묵소거사자찬 1837~40년, 지본묵서 30.2×128.5㎝(비단 回粧 포함 32.7×136.4㎝) 卷粧, 보물 제1685-1호. ⓒ국립중앙박물관



當黙而黙 近乎時, /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면 시(時:시의적절함)에 가깝고,
當笑而笑, 近乎中. / 웃어야 할 때 웃으면 중(中:들어맞음)에 가깝다.
周旋可否之間, /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이와
屈伸消長之際, / 굽히고 펴며 쇠하고 자라는(변화를 반복하는) 사이에,
動而不悖於天理, / 행동할 때 천리에 어긋나지 않고
靜而不拂乎人情, / 가만히 있어도 인정을 거슬리지 않으니,
黙笑之義, 大矣哉 / 침묵하고 웃는 뜻이 크도다.
不言而喩, 何傷乎黙, / 말하지 않아도 깨우치니 침묵한다고 무엇이 문제이며,
得中而發, 何患乎笑. / 중(中)을 얻어서 발산하니 웃는다고 무엇이 해로우랴.
勉之哉. / 힘쓸지어다.
吾惟自况, 而知其免夫矣. / 내가 스스로를 견줘보니 (화를) 면할 수 있음을 알겠노라.
黙笑居士自讚 / 묵소거사가 스스로 찬하다.


벗을 위해 써내려간 추사의 수작

글씨는 붉은 바탕에 금박을 뿌린 쇄금지(灑金紙)에 가로세로로 정간을 친 뒤 단정하고 정중한 해서체로 썼다. 한 줄에 4자씩 모두 21줄에 82자를 쓰고 말미에 [완당阮堂] [김정희인金正喜印] 인장을 먹으로 찍었다. 글씨 둘레의 회장(回裝) 비단에는 김유근의 인장 21과(顆)가 찍혀 있다. 위아래 글씨 바탕과 회장 비단에 마치 편지를 봉함하듯이 [취옹醉翁]과 [황산]이란 아호인을 35번씩 찍었고, 오른쪽 회장에 9과 왼쪽 회장에 10과를 찍었다. 모두 89과 인적(印跡)인데, 시문 명구가 대부분이나 그중에 취옹·황산이란 봉함인과 소한거인·옥경산방·옥경서재·묵소거사·김유근인 등의 별호인·성명인이 있어 누구의 인장인지 짐작할 수 있다.

김정희는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저수량(褚遂良)·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을 두루 익혔는데, [묵소거사자찬]은 명료한 획법, 긴밀한 짜임에서 김정희가 당나라 해서를 어떻게 소화해냈는지를 보여주는 50대 전반의 수작(秀作)이다.


정치적 관계를 넘어선 벗과의 깊은 소통

이 작품을 이해함에 있어 김유근의 후년 생애가 중요하다. 그는 안동김씨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아들로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오빠이다. 부친 사망 후 군사 실권을 물려받아 판돈령부사에 올랐다. 그러나 53세이던 1837년경 중풍에 걸려 실어증(失語症)으로 고생하다가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대해서 『헌종실록』 김유근 졸기(卒記, 1840. 12. 17)에 적혀 있다.

보국숭록대부(정1품 하계) 판돈령부사 김유근이 떠났다. 하교하기를 “이 중신(重臣)의 곧고 밝은 모습과 넓고 높은 식견과 밝고 통달한 재주를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의리로 고락을 같이하고 능히 선대(先代: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무공(武功:훈련대장·호위대장 등 지냄)을 뒤이어, 변함없이 나라를 위해 근로가 오래 드러났으니 조정에서 의지하고 중시한 것이 어떠했겠는가? 불행히도 집에서 병을 오래 앓아 내가 못 본 지 이제 몇 해인데 문득 서단(逝單:사망자 단자)을 보니 내 마음이 이처럼 몹시 슬픈데, 더구나 우리 동조(東朝:순원왕후)의 매우 절박한 슬픔이야? 떠난 판돈령 김유근의 집에 동원부기(東園副器:장생전의 왕실용 널감) 1부를 실어 보내고, 원래의 치부(致賻:초상집에 돈이나 물품을 보내던 일) 외에 별도의 치부를 해당 관서로 하여금 넉넉히 실어 보내며, 상복을 입는 날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제문을 보내 죽은 신하를 제사하던 일)하게 하라.” 하셨다.

김유근은 성품이 결백하고 솔직하며 곧고 밝아서〔白直貞亮〕 뜻에 맞지 않은 것을 보면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략) 비록 사무에 대한 경륜은 그의 잘하는 바가 아니었으나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감싸는 일념은 대개 명확하였다. 문한과 필묵을 좋아하고 시(詩)에 능했는데 시에는 원(元)나라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 병을 얻어 말을 하지 못한 지 4년 만에 떠나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모두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다양한 인장을 사용한 [묵소거사자찬]

김유근의 안동김씨 집안과 추사의 경주김씨 집안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적 관계를 떠나 시서화를 통해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황산유고』 권4 「그림 족자에 쓰다(書畫幀)」라는 글은 김유근이 김정희와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과 함께 나누었던 교분을 짐작하게 한다.

나와 이재·추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석교(石交:금석처럼 변치 않는 우정) 사이이다. 서로 만나면 정치적 득실과 인물의 시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영리와 재물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오직 고금(古今)에 대해 토론하고 서화(書畫)를 품평할 뿐이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문득 슬프고 잃어버린 듯하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근심과 걱정, 질병과 고통, 영화와 쇠락, 슬픔과 즐거움 말고도 탈 없는 날이 어찌 하루도 없겠냐만, 하루도 만나지 않는 날이 없다는 것은 이 또한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림과 글씨란 것은 그 사람의 성명과 자호가 뚜렷하게 그곳에 있어 마치 그 사람을 만나는 것과 거의 같다. 옛 그림 족자 하나를 얻으면, 왼쪽과 오른쪽에 모두 두 사람(이재·추사)의 도장을 찍어 만나보는 것을 대체하는 자료로 삼는다. 비록 하루도 만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터운 교분과 문사적 행위는 〈묵소거사자찬〉을 이해하는 열쇠다. 즉 김정희는 실어증으로 고생하는 친우를 위해 그의 자찬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썼을 것이고, 이에 김유근은 자신의 인장을 그 둘레에 에워싸듯이 찍어 친우의 정성된 마음에 화답했던 것이다. 참으로 글씨와 인장이 어우러져 돈독한 우의(友誼)를 나타내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 뒤 김유근의 병세가 심해졌을 1840년 9월, 김정희는 과거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9년 뒤 1848년 12월 초에서야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래서 김유근은 친우의 유배를 막을 수 없었던 듯하고 김정희는 친우의 장례길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세월의 부침 속에 안타까운 이별을 겪고 서로가 멀리 떨어졌지만, 김정희와 김유근은 〈묵소거사자찬〉을 통해 서로 마음을 터고 깊이 소통하는 금석지교(金石之交)를 나누었다. 선비들의 소통은 정치적인 관계를 넘어설 정도로 숭고한 것이었다. 출처/ 이완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