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 (安東 鳳停寺 極樂殿)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 (安東 鳳停寺 極樂殿)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호신 '천등산 봉정사' 한지에 그린 수묵 담채화 (88 x 137cm )가 봉정사 전경을 잘 보여 준다. 그림에 나오는 맨 앞의 구부러진 소나무와 높게 일직선으로 뻗은 전나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경 산수(眞景 山水)이다.

"天燈山鳳停寺"란 편액이 걸려있다. "東農 老煥書" 金嘉鎭(1846~1922)이 1913년에 썼다.


 만세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는 대웅전 앞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본디 德輝樓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만세루로 바뀌었다. 건립 후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형의 경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앞면은 2층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672년(문무왕 12)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1972년에 해체 수리할 때 극락전에서 발견된 1625년(인조 3)의 상량문(上樑文)에는 1363년(공민왕 12)에 건물의 지붕을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서, 적어도 고려 중기인 12∼13세기에 세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 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에, ‘부(府)의 서쪽 30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하였으며, 1566년(명종 21) 퇴계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동쪽에 있는 낙수대(落水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 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있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55호인 봉정사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봉정사 고금당(古今堂)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僧房)·만세루(萬歲樓)·우화루(雨花樓)·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총 높이 3.35m의 삼층석탑이 있고, 경판고(經板庫)에는 대장경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는 퇴락한 영산암(靈山庵)과 오른쪽 골짜기 부근의 지조암(智照庵)이 있다.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鳳停寺 極樂殿)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 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보고 있다.

가운데 극락전, 왼쪽 건물이 화엄강당, 오른쪽이 고금당이다.

極樂殿 편액 "光緖 八壬午四月改彩, 丙寅六月日松坡童蒙書"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첨차는 도리 방향으로든 보 방향으로든 행공첨차(行工檐遮)를 쓰지 않았고, 출목의 첨차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고 이로써 지붕 전체를 받치게 하였다. 건물 바깥쪽으로는 정면 가운데칸에 판장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광창(光窓)을 내었으며, 그 밖의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아 감실형(龕室形) 건물을 구성하였다.

정면 창방(昌枋) 위에는 산 모양으로 만든 복화반대공(覆花盤臺工)을 칸마다 얹어서 뜬장여를 받쳤다. 기둥머리에 짜올린 공포(栱包) 가운데 도리 방향으로 놓은 첨차로 위 뜬장여를 받치고, 다시 뜬장여 위에 놓은 첨차로 주심도리(柱心道里)와 외목도리를 받쳤다.

측면의 가구(架構)는 기둥 높이에 변화를 주어 귀기둥을 평주(平柱)로, 그 안쪽의 두 기둥을 약간 높은 고주(高柱)로 하고, 가운데 고주는 마루도리까지 올라가게 하였다. 여기에 따라 보의 높이에도 변화를 주었다.

기둥머리 위에는 3겹으로 포갠 첨차와 장여 및 주심도리가 길게 튀어나온 채 측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종중도리(宗中道里) 및 외목도리와 더불어 9량가(九樑架)를 이루고 있다. 한편, 마루도리와 주심도리를 잇는 八자형 솟을합장을 둔 것이 특색이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네모반듯한 벽돌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佛畫)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多包式)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닫집(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을 마련하였다.

대들보 위에 2개의 복화반대공을 놓아 덧보를 받치고 이 위에 종보를 놓았고, 종보 위에는 다시 대들보 위 복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의 대공을 올려 종도리를 받았다. 종도리 양옆에는 솟을합장을 두어 측면으로 힘을 전달하도록 처리하였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 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이 건물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 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古式)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안쪽으로 굽어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차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상북도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 경주 불국사 청운교 돌난간의 기둥,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기둥 등은 봉정사 극락전의 가구형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교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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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